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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劉表)의 부하 [[황조 (후한)|황조]](黃祖)의 아들이며, 황역 또한 유표의 밑에서 장릉태수(章陵太守)를 지냈다.
 
[[건안]](建安) 4년([[199년]]),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 (후한)|유훈]](劉勳)은 [[손책]](孫策)의 공격을 받아 유기성(流沂城)으로 퇴각하면서 [[황조 (후한)|황조]](黃祖)에게황조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훈은 손책에게 격파당하였고, 곧 유훈은 [[조조]](曹操)에게 몸을 의탁하였기 때문에 황조는 철군하였다. 손책은 그대로 하구(夏口)까지 진격하였고, 황조의 처자식 7명을 사로잡았다.
 
건안 5년([[200년]]), 손책이 피살당하고 그의 동생 [[손권]](孫権)이 즉위하였다. 손권의 대에 황역은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상현(柴桑縣)을 공격하였다.<ref>《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건안 11년([[206년]])에 황조의 부장 [[등룡]](鄧龍)이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상을 공격하였다가 [[주유]](周瑜)에게 사로잡혔다는 기록이 있으나, 본문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ref> 그러나 손권 휘하의 별부사마(別部司馬) 겸 시상현장(柴桑縣長)인 [[서성]](徐盛)이 병사 200명을 이끌고 황역을 공격하였고, 황역은 크게 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