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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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을 종결시킨 4개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다. [[1644년]] 8월의 격렬했던 [[프라이부르크 전투]](상대는 [[프란츠 폰 메르시]]가 지휘하는 [[바이에른]]군)는 프랑스가 [[필리프스부르크]] 포위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벌인 최초 원정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투였다. 항복시키기 전 앙기앵 공작은 철수하고 지휘를 튀렌에게 맡겼다. 튀렌 원수는 확고하게 전방으로 이동하여 [[1645년]] 원정을 전개하자 메르시는 이에 놀라 [[5월 2일]] [[마리엔탈 전투]]에서 튀렌군을 물리쳤다. 앙기앵 공작이 다시 프랑스군을 이끌고 전방으로 돌아왔다. 튀렌군은 스웨덴군과 헨센-카셀측 백작군에서 파견된 분견대의 도착에 힘입어 상당한 증원부대를 얻게 되었다. 스웨덴군은 곧 돌아갔으나 프라이부르크 보다 더 강력한 전투에서 바이에른군과 상대할때 앙기앵 공작은 2만의 병사를 지휘했다. 프랑스군은 메르시를 전사시키고, 1645년 8월 3일 [[뇌르틀링겐 전투 (1645년)|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바이에른군을 물리쳤다.
병치레가 심한 앙기앵 공작은 그후 곧 프랑스군 사령관에 튀렌을 임명하고 자신은 전선에서 물러났다. 다시 대규모 군대를 모은 황제군에 대해 쐐기를 박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은 튀렌이 [[토리아]] 공략에 이르러 전승이란 빛나는 전공을 얻는것으로 종결되었다. [[1646년]] 그는 결국 결정적인 전승을 얻었고, 이것으로 바이에른군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떨어져 나가는것으로 인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바이에른 선제후)|막시밀리안 1세]]는 화평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서명한것은 1647년 3월 14일). [[1647년]] 튀렌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약체화된 군대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나, 전략가는 튀렌을 대신 대(對)플랑드르 전선으로 파견하였다.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군을 굴복시킬 기회를 놓친것 뿐만 아니라
튀렌은 곧이어 [[룩센부르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라인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튀렌은 휘하의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눈부신 전적을 거두었고, 5월 17일 시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행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다. 군대는 그 결과로써 더 확고해 졌다. 휴전조약이 체결될때까지 화전과 백병전으로 바이에른을 황폐화 시켰다. 이 파괴는 많은 현대작가들이 비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당시 전시(戰時)의 정신과 전투행위에서 허용한 상황보다 가혹한 방법이 채택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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