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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안동]] 태생으로, 한학을 공부하다가 근대 교육과 민족주의 운동으로 뜻을 돌려 [[1907년]] [[유인식]], [[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협동학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안동 지역에서 개혁 유림 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3년제 중등학교였다. 이 무렵 계몽 운동에 뛰어든 인사들 중 [[신민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내다보고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도 [[양기탁]] 등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910년]] 마침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이 계획을 구체화하여 [[1911년]] [[간도|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1858년)|이상룡]], [[윤기섭]] 등과 함께 간도 지방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데 참가했다. 경학사는 자치 조직,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도 지역에서 군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무오 독립 선언]]에 [[무오 독립 선언 민족대표 39인|39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