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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의 역사 ==
히타치노쿠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지배를 인정받은 [[센고쿠 다이묘]] [[사타케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54만 석의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사타케 요시노부 (에도)|사타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게이초]] 7년([[1602년]]), [[데와노쿠니]] [[구보타 번 (데와노쿠니)|아키타]] 21만 석 영지로 삭감 전봉되었다. 그 후 히타치노쿠니 미토에는 사쿠라({{lang|ja|佐倉}})로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섯번째 아들인 [[다케다 노부요시]]가 15만 석 영주로서 입봉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게이초 8년([[1603년]]), 노부요시는 급사하였고, 이어서 이에야스의 열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입봉하였다. 요리노부도 게이초 14년([[1609년]]) [[슨푸 번|슨푸]]로 영지를 옮기게 되면서, 미토에는 요리노부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인 이에야스의 열한번째 아들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들어왔다. 당시 영지는 25만 석이었고, 이후 28만 석으로 증가되었으며, [[겐로쿠]] 연간에는 고쿠다카가 35만 석에 이르렀다.
 
미토 번주가 된 미토 도쿠가와 가는 [[고산케]] 중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에도 정부(定府), 즉 에도에 상시 근무하는 것으로 정해져, [[쇼군]]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때문에 미토 번주는 격식을 우선하게 되어 실태와 맞지 않는 고쿠다카 개정을 행하게 되었고, 실제 수확량이 표면적인 고쿠다카를 늘 밑도는 상황이 발생했다. 막부에 대한 군사 요역 등은 격식에 맞춰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미토 번은 이에 따른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요리후사는 맏아들 [[마쓰다이라 요리시게|요리시게]]가 아닌 셋째 아들 [[도쿠가와 미쓰쿠니|미쓰쿠니]]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는 요리후사가 형인 [[도쿠가와 요시나오]], 요리노부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꺼려서 맏아들 요리시게를 서장자(庶長子)로 대해 번주직을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요리시게는 [[다카마쓰 번]] 12만 석 영지를 지급받았다. 2대 번주 미쓰쿠니는 학문을 좋아하였고, [[대일본사]]의 편찬을 시행하여, 미토 번에 존왕(尊王)의 기풍을 심어놓았다. 이러한 토양을 바탕으로 미토 번에서 발생한 [[미토학]]은 막부 말기 [[존왕양이]] 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번 통치의 개혁과 막부 정치에 대한 참여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그가 존왕양이적인 경향이 강했던 관계로 막부로부터 멀어져 나중에는 은거당하게 되었다.
 
== 역대 번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