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중국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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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남 왕씨]](濟南王氏, 왕이문, 왕봉강)의 시조는 중국 산동성 제남(濟南) 출신 '''왕이문'''(王以文)이다. 그는 중국 산동성 지난의 장추현[章丘縣]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봉강'''(鳳崗), 자는 기양(岐陽)으로 후에 효종이 '''이문'''(以文)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고조부는 태학사를 지낸 '''왕훈'''(王訓), 증조부는 병부상서를 지낸 '''왕취화'''(王翠華), 조부는 산시성 순무안찰사도어사를 지낸 '''왕집'''(王楫), 아버지는 좌춘방태학사 겸 이부시랑을 지낸 '''왕충추'''(王忠推)이다. 왕이문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때인 1636년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청나라의 침공으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섬으로 피난하였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선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선양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봉림대군과 교분을 맺고, 1645년(인조 23년) 봉림대군 일행이 귀환할 때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왕봉강'''과 함께 '''왕문상'''(王文祥), '''풍삼사'''(馮三仕), '''황공'''(黃功), '''정선갑'''(鄭先甲), '''배삼생'''(裵三生), '''양복길'''(楊福吉), '''왕미승'''(王美承), '''유계산'''(柳溪山)등 모두 9명의 명나라 사람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을 '9의사(九義士)'라 칭한다. 제남 왕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244가구 779명이다.
 
[[제남 왕씨]](濟南王氏, 왕유)의 시조는 '''왕유'''(王儒)이다. 그는 처음에 박씨(朴氏)였는데, 태봉국(泰封國) 궁예(弓裔) 휘하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궁예의 횡포가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등용되어 공을 세워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왕씨(王氏)로 사성받았다. '''왕유'''(王儒)가 본래 박씨였다고 전하지만, 제남은 중국의 지명이기 때문에 본래 왕씨였을 개연성도 있다.
 
==강릉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