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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은 대체로 한국 각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장([[시장 (경제)|시장]]) 의 개장일에 맞추어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참가했던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일본제국은 통치 방식을 형식적으로나마 헌병 경찰 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같은 해에 3·1운동을 원동력으로 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통령중심제로 3권분립 체제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적, 군사적, 노력에 힘썼으나, 1920년대 중반무렵에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으로 여러 독립운동 인사들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국무령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게 되고, 이후 여러 고난과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40년대에 [[중일전쟁]]이 한창이였을 무렵, 임시정부 인사들은 여러 어려움과 고난 등을 겪은끝에 [[충칭]]에 임시정부를 정착. [[김구]]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어서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여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중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으며 [[1942년]] 2월에는 대독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세력이 임시정부에 합류함에 따라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기틀이 마련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는데, [[1943년]]에 버마 전선의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자 공작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포로취조 및 암호번역, 선전전단 작성, 대적 회유방송 활동 등 하였다. 이어서 한국 광복군은 미국 OSS와 연합하여 [[1945년]] 9월에 국내진공 작전에 준비하고자 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런 일본제국의 항복으로 이를 이루지 못했다. 임시정부 주요인사들은 [[1945년]] 12월에 개인자격신분으로 국내에 귀국하게 된다.
 
=== 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