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바트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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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이후에도 그의 유해는 정상적으로 반환되지 않고 프랑스에 귀속되었으며, 그의 외모때문에 동물이라는 주장도 여전했다. 그 주장을 근거로 바트만의 유해는 뼈와 성기, 뇌 등의 내장이 들어내져 연구 대상이 되거나, 박제로 만들어져 1974년까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호텐토트 비너스' 200년만에 고향땅에 안장|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218775|출판사 = 연합뉴스|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08-08|확인일자 = 2010-01-31}}</ref> 그러나 그의 유해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과가 나와 동물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후에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유해 반환 시위가 일어났으나 프랑스는 사라 바트만의 박제에 대해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의 소유'라는 관련 법규를 들어 남아공으로의 반환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사람의 신체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는 다른 법 규정을 들어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였다. 결국 [[2002년 5월]] 프랑스는 악화되는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 바트만의 유해를 200년만에200년 만에 본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스턴 케이프주에 반환 하게반환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호텐토트 비너스' 200년만에 고향땅에 안장|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218775|출판사 = 연합뉴스|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08-08|확인일자 = 2010-01-31}}</ref>그의 매장식에는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비롯, 8천여명이 참석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상징물 '호텐토트 비너스' 200년만 귀향|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147809|출판사 = 한국일보|저자 = 김범수 기자|쪽 = |작성일자 = 2002-08-09|확인일자 = 2010-01-3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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