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필하모니 관현악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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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바츨라프 탈리히]]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으며, 1931년에 잠시 사임한 것을 제외하고 1941년까지 장기간 재임하면서 악단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탈리히 재임기에 체코 필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 출연과 레코드 녹음도 이 때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1941년에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탈리히는 직위해제 처분을 당한 뒤 국민극장으로 옮겼고, 후임으로는 [[라파엘 쿠벨릭]]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독일군 지배하에서 악단은 관제 행사에 동원될 것을 강요당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사실상 활동 정지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국립 관현악단으로 승격되었고, 쿠벨릭이 계속 상임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1948년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서 쿠벨릭은 해외로 망명했고, 약 2년 간2년간 탈리히와 [[바츨라프 노이만]] 등의 객원 지휘로 운영되었다. 1950년에 [[카렐 안체를]]이 상임 지휘자로 취임해 본격적인 악단 재건을 시작했으나, 1968년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 (운동)|프라하의 봄]] 시민 봉기가 소련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자 [[캐나다]]로 망명했다.
 
안체를의 후임으로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에서 근무하던 노이만이 임명되었으며, 노이만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민주화되던 1989년까지 21년간 장기 재임하면서 탈리히 재임기 때의 명성 회복에 주력했다. 노이만의 후임으로는 1990년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가 발탁되어 1992년까지 재임했으며, 이어 [[게르트 알브레히트]]와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연주력이 점차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되었으며, 2003년에는 아슈케나지의 후임으로 [[즈데넥 마칼]]이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