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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919년 임시정부 요인들.jpg|thumb|200px|right|임시의정원 동료들과 함께. 앞줄 맨왼쪽 연두색 원이 이유필]]
이유필(李裕弼, [[1885년]] [[11월 28일]]~[[1945년]] [[11월 2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호는 춘산(春山).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이계초(李啓初)이다.
 
== 생애 ==
1900년대 초 [[안창호]]·[[전덕기]]·[[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12년 일본 정부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할 목적으로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져 1년간 진도에 유배되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발생하자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19년]]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하였고 [[4월]] [[상해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을 역임했으며, [[이광수]]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을 주도했다. [[1920년]] [[안창호]]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그해 [[8월]]에는 미국 상하원의 의원단을 찾아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1년]] [[4월]] 한·중 양국이 서로 도와 대일항쟁에 공동 대처하자는 취지로 중국인 우산(吳山)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설립에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