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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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9년]]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임을 선언하고 타도령을 내린다. 2월1일 호메이니 귀국.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월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 혁명]]이다. 1979년 2월 5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Mehdi Bazargan)을 임시 정부 수반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슬람 최고 혁명 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정규군과 별도로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12월에는 이슬람 공화국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11.4)이 발생했다. 이 인질 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년]] 1월 [[바니 사드르]](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 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만에1년 만에 실각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Masoud Rajabi)와 함께 81년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 시|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 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 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 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 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1981년]]말 [[혁명]]은 초기의 불안 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이란을 선제 공격하였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1980년]] 7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