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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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넬레스키의 생애 초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토니오 마네티와 [[조르조 바사리]]의 저작이 유일한 기록이다.<ref>브루넬레스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바사리의 저술의 영문판을 보려면 :http://www.fordham.edu/halsall/basis/vasari/vasari5.htm</ref> 이 기록들에 따르면 필리포의 아버지는 브루넬레스키 디 리포(Brunellesco di Lippo)이고, 어머니는 줄리아나 스피니(Giuliana Spini)이다. 필리포는 세 자녀들 중 둘째였다. 젊은 필리포는 공무원인 그의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할 의도로 문학과 수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예술에 마음을 둔 필리포는 금 세공사, 금속 세공사, 청동 세공사가 포함된 비단업자 길드인 아르테 델라 세타(Arte della Seta)에 등록하게 된다. 그는 1398년 금 세공 장인이 된다. 그가 속해있던 길드와 같은 길드에서 지은 그의 처음으로 중요한 작품인 [[오스페달레 델리 이노첸티|고아원]]과 브루넬레스키가 금 세공 장인이 된 것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ref>Eugenio Battisti. ''Filippo Brunelleschi''. (New York: Rizzoli, 1981)</ref>
 
1401년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에 있는 [[세례당]]의 청동 문 세트를 디자인하는 공모전에 응모했다. 다른 젊은 금 세공인인 [[로렌초 기베르티]]와 함께 그는 이삭의 희생을 묘사한 금으로 도금된 청동판을 만들어냈다. 기베르티가 이삭의 모습을 나체의 토르소로 묘사한 데 비해 브루넬레스키의 참가작은 '가시 잡아당기는 사람'으로 알려진 고전적인 조각상을 참고했다. 1403년 기베르티가 그의 월등한 숙련된 기법으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기베르티의 청동판은 청동 주조의 매우 세련된 지식을 보여준다.; 이 청동 판은 한 조각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브루넬레스키의 청동판은 뒷판에 볼트로 죄여진 몇 개의 조각들로 구성된다. 기베르티는 세례당을 위한 두번째두 번째 청동 문의 제작에 착수했는데, 그 아름다움은 100년 뒤에 [[미켈란젤로]]가 "분명히 이것은 [[산 조바니 세례당|천국의 문]]이다"라고 칭송할 정도였다.<ref>Paul Robert Walker. ''The Feud that Sparked the Renaissance: How Brunelleschi and Ghiberti Changed the Art World''. (New York: William Morrow, 2002).</ref>
 
=== 건축가로서의 브루넬레스키 ===
[[파일:Einblick LH2 San Lorenzo Florenz.jpg|thumb|left|upright|산 로렌초 성당의 네이브, 1421-1440.]]
브루넬레스키가 처음으로 받은 의뢰는 고아원인 [[오스페달레 델리 이노첸티]](1419년-1445년경)이다. 이 건물의 긴 로지아(회랑)은 빈틈없고 구불구불한 피렌체 거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의 아치들은 각각 8m 높이이고, 건물은 장엄하나 절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리석이나 상감 세공 등의 장식이 보이지 않는다.<ref>Klotz, Heinrich Klotz. ''Filippo Brunelleschi: the Early Works and the Medieval Tradition''. (translated by Hugh Keith) (London: Academy Editions, 1990). </ref>
이 건물은 역시 피렌체의 고전 고대를 참고하여 기둥과 주두에 응용한 첫번째첫 번째 건물이다. 또한 이것은 피렌체에서 고전의 기둥과 주두를 명확하게 참고하여 만든 첫번째첫 번째 건물이다.
 
곧 다른 의뢰들이 들어왔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대성당]] (1419년-1436년)과 성구실이다. 1418년경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 외에 성당의 복잡한 역사는 말하지 않겠다. 문제는 이전 세기에 건물이 설계되었을 때, 아무도 [[로마]]에 있는 [[판테온 (로마)|판테온]]의 돔보다 규모가 큰 이 돔을 어떻게 지을지 의견을 내지 못하였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 이래로 이러한 크기의 돔은 없었다.) 도시 신부들이 [[버트레스]]를 금지했기 때문에 길고 강한 (그리고 충분한 양의) 비계로써 작업을 위해 서까래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했다. 이 크기의 돔이 어떻게 지어질 수 있을지 또는 붕괴를 막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압축응력이 이 시대에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과, 또 이 시기에 사용된 모르타르가 꽤 오랜 시간 비계 위에서 변형을 유지하면서 며칠간 기다려야 자리를 잡는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ref>Ross King,''Brunelleschi's Dome, The Story of the great Cathedral of Florence'', Penguin, 2001</ref> 1419년 양모 상인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설계 경기를 연다. 두명의 주요 경쟁자는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로 브루넬레스키가 우승하여 의뢰를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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