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시들해봇 (토론 | 기여)
시들해봇 (토론 | 기여)
잔글 위키백과:봇/편집 요청#2010-03-26 Dalgial의 요청의 일부(세~아홉 번째, 우승 팀)
14번째 줄:
[[기원전 54년]]경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갈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지휘력으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의 후반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개인적으로 방탕하고 분방한 성품때문에 종종 카이사르를 짜증나게 했다. 카이사르의 호의로 그는 원로원에 들어갔으나 보수적인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자 원로원에서 추방당해 카이사르 진영에 합류하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때 함께 했다. 이어 벌어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그는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맞서 싸웠고 전과를 올렸다.
[[기원전 47년]]경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취임하고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축출하는 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통치를 맡았으나 [[키케로]]가 지적한 대로 낭비가 너무 심한 행정때문에 시민들의 반감을 사고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2년간 전혀 왕래없이 지내다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다섯번째다섯 번째 집정관 임기때 동료[[집정관]]직에 올랐다.
 
같은해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왕위를 노린다는 협의로 [[원로원]]에서 암살당하고 그 혼란중에 안토니우스는 노예로 변장하고 로마를 탈출하였다. 곧 로마로 돌아와 그는 카이사르를 변호하여 그의 암살의 부당함을 로마 시민에 설득시키고 여론을 반전시켰다. 6월에 그는 카이사르 군대에 힘입어 카실피나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끈질지게 그에 대해 비난했으며 이에 힘입어 [[기원전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권을 주고 그해의 집정관 두 명과 함께 안토니우스를 공격하게 했다. 4월 안토니우스는 포룸 갈로룸과 무티나에서 패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퇴각했다. 두 명의 집정관은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혼자 권력을 차지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집정관직을 수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동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인 [[레피두스|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세력을 불렸다.
21번째 줄:
원로원 공화파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반 카이사르파를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자 [[기원전 43년]] 11월초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에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만났으며 세 사람은 공식적으로 5년 기한의 독재통치 협정을 맺어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 이듬해 10월 [[마케도니아 (로마)|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두번의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패하여 자살했다. 이로서 카이사르파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모두 제거 되자 제2차 삼두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와 동방의 속주,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속주를 각각 맡아 통치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구역인 동방 속주를 둘러보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타르수스]]로 불러 그녀의 반란혐의를 조사하고 이후 [[기원전 41년]]과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다. 한편,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안토니우스의 세번째세 번째 부인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독자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주동하고 로마를 잠시 장악했다가 실패하고 페르시아로 퇴각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풀비아가 죽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담당한 동방지역에서는 로마의 전통적인 적대국인 [[파르티아]]가 로마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이후 두사람은 동방정책에 대해 합의했는데 [[헤로데 대왕|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또한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적질을 하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잠시나마 휴전을 하였다. 이 휴전을 하면서 두사람은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 [[기원전 38년]] 타렌툼에서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동방원정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합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