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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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때는 원수를 역임했다. [[울산성 전투]]에서는 [[명나라]]의 대군에게 포위된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섰다. 우이진(初陣)에서 스스로 야리(槍)를 손에 들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활약했지만, 본래 원수인 히데아키는 부산성을 수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선 것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비판받는다. 그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해 [[에치젠노쿠니|에치젠]] [[후쿠이 성|기타노슈]] 15만 석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비판 받은 것은 구원에 나선 점이 아니라 히데아키 자신이 다수의 목을 취할 정도로 분투한 점이란 설<ref>만에 하나 상대에게 역습당해 대장인 히데아키가 목을 떨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니까</ref>이 있고, 조선 병사가 아닌 일반인을 공격한 점이란 설도 있다).
 
이 처분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참언의 의한 것이란 이야기도 있는데 명확하지는 않다. 이 때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중재를 해주었다고 하지만, 다이코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의 사후 히데아키가 영지를 회복한 데에 한마디 거든 것뿐이며 실제로 중재를 한 적은 없다.
 
=== 세키가하라 전투 ===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후시미 성]] 공격 후 이에야스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낸 점과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동군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와 서간을 주고받은 점에서, 이미 동군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후시미 성]] 공략전에 참가해 전공을 올렸지만, 이 전공을 미쓰나리가 인정해주지 않아 배신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이설도 있다. 현재에 남아있는 문서로는, 미쓰나리가 [[간파쿠]](関白)의 지위를 약속하며 서군에의 동참을 촉구하는 것과,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의 연명으로 「우리들은 기타노만도코로([[고다이인 (1542년)|네네]])님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쓰여있는 것 2통이 있다.
 
히데아키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낀 [[이시다 미쓰나리]]와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들은, 서군이 승리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성인이 되는 날 까지의 [[간파쿠]]직 취임과 [[기나이]]의 구니(国) 두 곳을 가증해주는 것을 약속하는 등 서군에의 잔류 공작을 행했다. 결전 당일 히데아키는 [[마쓰오 산 (기후 현)|마쓰오 산]]에 1만5천의 대군을 이끌고 포진했다. 이 때이때 마쓰오 산에는 이미 서군의 일부 장병이 들어와 있었지만, 히데아키는 군세의 수를 듣고 이들을 내쫓은 후 마쓰오 산에 진을 깔았다(이 시점에서 이미 동군에 가담했다고도 여겨진다).
 
히데아키의 마음은 동군에 있었지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부대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를 격파하고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도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부대를 패주시키는 등, 전황이 서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감에 따라 동군 참가를 주저했다는 설과,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가 3만8천의 대군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를 향했는데 통 나타나지 않는 것에 수상함을 느껴 참전을 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