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울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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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캐서린은 자신이 헨리 8세와 결혼하기 전까지 자신이 처녀였다고 주장했다. 캐서린이 혼인 무효 선언과 그녀의 이전 신분인 웨일스 공의 미망인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혼인 무효 신청은 국제적인 외교 문제가 되었으며,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교황이 숙모와 헨리의 혼인을 무효로 하지 못하도록 위협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간에 카를의 분노를 사거나 그렇지 않으면 헨리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었다. 그는 결정을 발표하는 것을 가능한 한 오래 끌었으며, 이에 화가 난 헨리와 앤은 교회에서 높은 지위인 교황 특사인 울지의 충성심까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529년에 헨리가 자신의 런던 안 주요 거주지를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바꾸면서 울지는 요크 궁전의 장대하게 넓은 대저택을 포함하여 자신의 정치 관저와 토지를 빼앗겼다. 그러나 울지가 요크의 대주교로 남아 있는 것은 허락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 소재지가 있는 [[요크셔]]로 여행을 떠나 요크셔 북부의 커우드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노섬벌랜드 백작에 의해 반역죄로 고발당하였다. 큰 곤궁에 처한 그는 자신의 개인 사제인 [[에드먼드 보너]]와 함께 런던으로 압송당하였다. 건강이 나빠진 울지는 [[1530년]] [[11월 29일]] [[레스터 (잉글랜드)|레스터]]에서 호송 도중에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당시 추기경은 “만일 내가 세속에 소요했던 시간만큼만 신을 섬겼더라면, 내가 이렇게 늙은 후에 신이 나를 져버리는저버리는 일은 없었을텐데….”라고 하며 깊이 후회했다고 한다. 이는 곧 그가 헨리 8세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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