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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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젊었을 떄부터때부터 명성이 있어 형주목인 [[유표]]가 초빙하려 했으나 거부했다.
 
208년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지배했을 때 조조에게 가자 초빙되어 속관이 되었으며 조조의 명으로 [[장사]], [[영릉]], [[계양]]을 조조에게 귀순시켰다. 그러나 후에 [[유비]]가 그 삼군을 지배하자 교지로 망명하여 유비가 이 일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후에 촉 땅으로 이주하였다. 《초국선현전》에 따르면, 유파가 교지로 망명하여 성을 장으로 고치고, 사섭과 맞지 않아 장가 땅으로 갔다가 익주군에 억류되어 [[유장]]에게 보내졌으며, 유파의 아비 유상이 유장의 아비 [[유언 (후한)|유언]]을 효렴으로 천거했으므로 유장이 유파를 보고 기뻐하여 매양 큰 일이 있으면 찾아가 물었다가 하나, 배송지는 유언이 영제 시대에 이미 태상이었고 익주목으로 나갔으며 유상은 손견이 장사태수이던 시절 강하태수였으므로 유상이 유언을 효렴으로 추거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또 《초국선현전》에 따르면 유장이 [[장로]]를 막고자 유비를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했으나 유장이 듣지 않아 두문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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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상서에 임명되었고, 220년 [[법정]]이 세상을 떠나자 법정을 대신하여 상서령까지 올랐다.
 
유파는 몸소 청렴하고 질박한 생활을 하였기 떄문에때문에 재산을 늘리지 않았고, 자신이 유비를 섬기는 것은 본심이 아니었으므로 의심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공손하고 말없이 조용한 태도로 견지했으며, 집에서는 타인을 사사로이 사귀지 않았고, 공적인 일만을 아뢰었다.
 
유비가 황제의 존호를 칭했을 때 <!--'황청상제*후토신지에게 명백하게 보고합니다' 등의--> 문장이나 임명서는 모두 유파가 지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