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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양전백.jpg|thumb|300px|양전백]]
'''양전백'''(梁甸伯, [[1869년]] [[3월 10일]] ~ [[1933년]] [[1월 17일]])은 [[한국]]의 [[장로교]]
== 생애 ==
[[평안북도]] [[선천군|선천]] 출생이다. [[1894년]] [[
선교사들과 더불어 선천에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설립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집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의 [[안창호]], [[정주시|정주]]의 [[남강 이승훈|이승훈]]과 함께 평안도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교육 사업가로 꼽히던 중, [[1911년]] [[105인 사건]]에 [[신민회]] 인사들과 같이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 [[1916년]]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미리 [[경성부]]에서 [[천도교]]와의 연합을 의논하고 돌아온 이승훈을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1877년)|김병조]] 등 이 지역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만난 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태화관]]에서 열린 낭독 행사에 참여했다. 선천에서는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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