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Npsp (토론 | 기여)
잔글 →‎서부 영국령 북미, 미국 거래: 익숙해 지기 → 익숙해지기 (익숙하+어지기)
Npsp (토론 | 기여)
9번째 줄:
뉴프랑스가 매우 넓은 영토에 설립되면서 [[프랑스인]]들은 원주민의 기술과 [[프랑스]]의 가치를 결합하여 혼합된 [[시민권]]을 만들어서 다양한 원주민과의 협력을 보호해야만 했다.
 
다음 150년이 넘게 [[캐나다]]와 아카디아는 세인트 로렌스 강의 중심지에서 대호수들과 [[북미]]의 미시시피 계곡의 상부 지역으로 계속 확장해 갔다. 그들의 팽창은 와이어도트 부족, 이로쿼이 부족, 그리고 특히 여러 [[전쟁]]을 한 [[영국]]의 반발을 샀고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을 보라) 그 전쟁들로 인해서 처음에는 아카디아를, 나중에는 [[캐나다]]를 [[프랑스]]는 빼앗겼다. [[영국]]의 지배 하에지배하에 아카디아인들은 1755년에 추방되었고 이것이 첫 근대 대규모 전체 인구 이주가 되었다. [[프랑스]]는 1758년 루이스버그에서, 그리고 1759년 퀘벡시의 아브라함 평원의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했다. 1763년 파리에서의 조약으로 [[프랑스]]는 캐리브 섬 [[식민지]]들은 유지하되 [[북미]]의 [[식민지]]는 대부분 [[영국]]과 [[스페인]]에 빼앗겼다. 북방 소유 중에서 유지되었던 것은 쌩-삐에르와 미퀠른의 어업기지가 전부였다. 그 결과 프랑스 고위층만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농부들은 정복자 영국의 자비에 맡기게 되었고 협정 조약으로 카나다인의 천주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식민시대 일련의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