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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2월]]에는 [[미국]]에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대안으로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추종세력이 미약하다 하여 곧 배제되었다.<ref>《한국과 6.25전쟁》(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30페이지</ref>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던 야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의원]]들의 존재는 해방정국부터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이승만]]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야당에서 내각제 개현을 추진하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추진을 위해 [[장택상]],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을 동원 [[1952년]] [[5월 25일]]일부터 [[7월 7일]]까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반(反)[[이승만]]의 기치하에 모였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바로 신당(新黨) 창당을 추진했다. [[죽산 조봉암]]은 이때부터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을 찾아와 함께 자신과 함께 신당운동을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장면은 한번에 거절하였다. 장면이 [[조봉암]]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조봉암]]의 정치노선이 탐탁치탐탁지 않다는 것과, 신당운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1952년]] [[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 고 위협했다.<ref name="leekh2">이야기로 엮은 한국사 세계사 비교연표 (이근호 저 | 청아출판사 | 2006.09.10) 208페이지</ref>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장면은 [[이시영]],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광역시|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다.<ref name="leekh2"/>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8월]] [[이승만]]은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대통령]]직선제로 선출했다. 이때 [[조봉암]]이 대선에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ref name="dd381">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81페이지</ref> 장면은 이때 [[김성수 (1891년)|김성수]]·[[김창숙]]·[[이동하]]·[[신익희]] 등 8명과 함께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ref name="dd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