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의 교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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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원시사회라 함은 역사적으로 문명사회 이전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인류가 가장 미개하여 그 조직이 단순하고, 개인이 집단의식(集團意識)에 포섭되어 독립하지 못하고, 종교 및 주술(呪術)이 큰 구실을 하던 사회 형태이다. 즉, 선사시대 인류의 사회를 말한다.지금의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방의 원숭이)→호모 에렉투스(直立人)→호모 사피엔스라는 3단계를 거쳐 진화했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네안데르탈렌시스와 사피엔스의 두 아종(亞種)으로 갈라진다. 우리와 같은 현생 인류는 바로 이 사피엔스의 아종에 속하며, 약 4만년에서 1만년에 걸쳐 구석기문화를 이룩하고 살았다.이들 인류가 생활하던 시대를 넓은 의미에서 석기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진 웅기(雄基) 굴포리(屈浦里)와 공주(公州) 석장리(石壯里)의 유적이 호모사피엔스의 유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인 한국민족이 그의 역사 무대에 등장한 정확한 연대를 헤아릴 순 없다. 구석기기대의 유적으로 두만강 기슭 동관진(潼關鎭)의 것이 보고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부근에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많이 흩어져 있어서 그것과 혼동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곧 화석(化石)과 연결시키어 구석기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단정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시사회라 함은 역사적으로 문명사회 이전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인류가 가장 미개하여 그 조직이 단순하고, 개인이 집단의식(集團意識)에 포섭되어 독립하지 못하고, 종교 및 주술(呪術)이 큰 구실을 하던 사회 형태이다. 즉, 선사시대 인류의 사회를 말한다.지금의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방의 원숭이)→호모 에렉투스(直立人)→호모 사피엔스라는 3단계를 거쳐 진화했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네안데르탈렌시스와 사피엔스의 두 아종(亞種)으로 갈라진다. 우리와 같은 현생 인류는 바로 이 사피엔스의 아종에 속하며, 약 4만년에서 1만년에 걸쳐 구석기문화를 이룩하고 살았다.이들 인류가 생활하던 시대를 넓은 의미에서 석기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진 웅기(雄基) 굴포리(屈浦里)와 공주(公州) 석장리(石壯里)의 유적이 호모사피엔스의 유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인 한국민족이 그의 역사 무대에 등장한 정확한 연대를 헤아릴 순 없다. 구석기기대의 유적으로 두만강 기슭 동관진(潼關鎭)의 것이 보고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부근에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많이 흩어져 있어서 그것과 혼동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곧 화석(化石)과 연결시키어 구석기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단정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한반도(韓半島)와 만주 남부에서 가장 문화단계가 빨랐던 것은 중국의 북부에서 랴오허(遼河) 방면을 거쳐서 대동강 방면으로 들어온 고조선(古朝鮮)으로, 전기에는 신석기문화였으나 후기에는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로 발전했다.그런데 교육은 인간생활 그 자체와 같이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정확히 말할 순 없다. 교육은 인류가 교육이라는 문제를 말하기 전부터 벌써 시작됐고 또 교육에 관한 서적이 나오기 오래 전에 벌써 교육에 관한 사고(思考)가 있었다.그러나 원시시대의 교육은 거의 목적의식이 없었다. 즉 원시인들의 행동은 거의 본능적 충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현재에만 얽매여서 미래에 대해 이해도 못하고 예측도 못하였다. 또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거의 생각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며, 파괴적 자연력(自然力)과 자기 이외의 인간으로부터 자기와 가족을 보호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그래서 원시인들은 교육의 첫째 목적을 '안전(安全)'에 두었다. 그들은 생물과 무생물에 공포를 느꼈다. 또 때로는 나무·암석·폭풍·천둥과 같은 모든 자연물이 생물과 같이 보이기도 했다. 자연의 신비성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만물이 다 희로(喜怒)를 하고 인간을 파괴도 하고 방임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초기 종교, 즉 물활론(物活論, animism)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물활론은 최초의 종교인 동시에 또한 인간에게 처음으로 철학을 준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사고(思考)가 발생하게 되었다.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간에 널리 퍼져 있는 샤머니즘(sham­anism)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최초 형태는 주위의 삼라만상에 정령(精靈)의 존재를 인정하는 애니미즘이라고 한다. 원시인들은 하늘의 해·달·별, 심지어 길가에 뒹굴고 있는 돌에까지도 정령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원시인들에게 매일 주어진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공포로부터 자기 생명을 보존하느냐였다.자연의 변화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압도해서 안주(安住)의 순간이 없었다. 언제나 공포가 그들의 마음속에 있고, 또 그것이 그들을 지배하였다.그러니 원시인들은 자기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교육의 기본목적을 안전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교육의 최초 동기(動機)는 공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원시교육의 둘째 목적은 '단결(團結)'에 있었다. 위험에 대한 공포가 원시인들을 가족·씨족·종족(種族)으로 결합시켰고, 여기에서 단결의 문제가 나오게 되었다. 단결은 개체(個體)를 보존하고 자기 가족 및 종족을 안전하게 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시인들은 자연적으로 발생된 혈족 및 종족단체에 결부되어 생활하였으며, 또 이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였다.또 이들은 석기(石器)나 궁시(弓矢)로써 단독으로 자연력과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종족간에 공동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의 노동·분배도 종족단체의 공동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원시사회는 자급자족하는 경제적인 독립체였으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서 생산·전쟁·종교 등에 관한 중대한 일도 종족회의에서 결정했다. 따라서 원시사회는 운명공동체적인 사회였다.그러니 원시인들은 그 자신과 집단의 안전을 위해서 단체에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그 집단의 한 사람이라도 종족의 습관과 풍습에서 이탈하는 것을 용서하지 아니 하였다. 그 결과, 원시교육에 있어서는 개인의식(個人意識)보다 단체의식(團體意識)이 강조되었고, 개인보다 단체의 안녕이 중요한 관심사(關心事)가 되었다.그러나 원시인들은 집단 및 단체생활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일을 연소자에게 가르치면서도 그것이 연소자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교육내용 역시 이러한 목적에 따라, 자기보존(自己保存)을 위하여 육체적 기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훈련과 자기와 종족의 안전을 위해 영혼(靈魂)을 위무(慰撫)하는 데 필요한 예전(禮典), 그리고 그들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관습·단결 등을 훈련받는 데 두었다.첫째, 원시인들은 자기보존과 육체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처음에 나무의 열매나 풀뿌리, 조개(貝)를 주워 먹는다. 때로는 먹이를 더 풍성하게 구하려는 기원도 했다. 그러다가 원시인들은 짐승과는 달리 본능적 욕구충족 문제에서, 오늘과 앞날을 위한 준비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즉 활과 낚시의 발명으로 비로소 수렵과 어로가 중요한 생업(生業)이 되었다.이에 따라 그들은 수렵·어로·전투를 익히게 되었고, 여기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며 또 이를 취급하는 법을 배웠다. 대개 이러한 학습은 종족의 연장자들이 소년들에게 가르쳤는데, 이로부터 기술교육이 시작되었다.둘째, 영혼을 위무(慰撫)하는 예전(禮典)은 바로 그들의 불가사의 혹은 신(神)을 진무(鎭撫)하는 의식(儀式) 제전(祭典)이었다. 원시인에게 자연의 신비성과 폭위(暴威)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기에 자연 숭배의 원시종교가 싹트고, 죽음에 봉착할 때도 원시신앙이 나타났다. 이 신앙은 여러 가지 주술적인 행위를 하여 신앙 대상을 위로하고 자기의 공포감을 덜어줄 것을 기원하는 것이 특색이었다.이러한 행동은 바로 무도(舞蹈)나 가요(歌謠)로서 나타나 예술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무섭거나 괴로운 마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예술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원시시대에 있어서 종교와 예술과 인간의 활동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신을 진정시키는 제전(祭典)은 대부분 상징(象徵)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에는 듣는 것과 보는 것의 2가지 상징이 있었다. 말하는 상징이 수적으로 늘었을 때 언어와 음악의 시작을 볼 수 있고, 자연숭배의 조상(彫像)·성단(聖壇)과 같은 시각상징(視覺象徵)의 발달로서 미술·벽화(壁畵) 등이 시작되었다.대체로 신을 위로하는 예전은 마법사·승려·사제(司祭)·무당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인간과 신의 중간에서 중매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또 때로는 질병(疾病) 역시 악한 영혼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추방하는 것도 이들이 맡았다. 대체로 샤먼의 기능은 아래 3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는 사제(司祭)적인 기능이요, 둘째는 예언적인 기능이요, 셋째는 치료의 기능이다. 샤먼의 무구(巫具)는 대개 방울과 북과 거울이다. 이 3가지를 선신(善神)은 좋아하고 악신(惡神)은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약(醫藥)을 무당이 맡았다는 것은 의(醫)의 고자(古字)가 의(▩)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무당을 '당굴' 또는 '단골'이라 하는 것은 당굴이 'Tengri'의 음역(音譯)으로서 그 원의(原意)가 '푸른 하늘' 또는 '제천자(祭天者)'라 함은 이미 정설(定說)이 되어 있다.셋째, 사회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관습은 그들의 연장자에게서 배웠다. 그들 사회에 필요한 관습의 훈련을 잘 받지 못한 연소자는 무조건 축출당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종족의 단결에는 종족의 습관과 풍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시교육은 개성의 차이를 개발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을 억제해서 종족의 성원을 불변케 하는 관습의 선(線)에 머무르게 했다.그러므로 종족간에 필요한 관습을 배우는 것은 그들 종족의 성원이 되는 자격이며, 종족 성원으로서의 특권은 이것을 수수(授受)하는 데 의하여 결정되었다. 종족의 결합에서 나온 이런 관습은 그들에게 사회상속이 되었는데 그 후에도 수세기 동안 원시 교육에서는 이런 상속을 연소자들에게 강제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관습 즉 사회상속은 그들 종족의 현상 유지에 필요한 규칙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원시인들은 신체 훈련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아(幼兒)에게는 공포심을 가지지 않게끔 하기 위하여 사람을 구타하는 법을 가르쳤고, 소년에게는 몸을 전후 좌우로 민첩히 움직이는 법과, 자기를 표적(標的)으로 하여 쏘는 창이나 화살을 피할 수 있게끔 훈련하였다. 그리고 청년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구타를 참고 견디는 훈련을 했고, 이와 아울러 용감한 행동을 하게끔 상무심(尙武心)을 북돋아 주었다.이러한 신체 훈련은 그들의 적인 동물이나, 인간 대 인간의 생존경쟁에서 그 자신과 종족을 보호하고 또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행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체육교육은 이미 원시시대부터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원시시대의 교육방법은 극히 자연적인 모방(模倣)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 아이는 어머니의 역할을, 남자 아이는 아버지의 역할을 모방했다. 그러나 소년이 아버지의 역할을 익혔을 때 교육 역시 끝이 나는 것이었다. 아동의 완구(玩具) 역시 어른이 사용하는 도구 즉 창·활·화살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또 하나의 원시인의 교육방법은 시행착오법(試行錯誤法)을 사용했다.그러나 이것은 종족의 습관과 금기(禁忌)·예전(禮典) 등의 생활풍속에 저촉되지 않는 행동에 있어서만 그러한 교육방법이 허용되었다.이 밖에도 원시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행사는 청년기의 입회식(入會式)이다. 그 목적은 종족 청년을 가치있는 사회일원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 일은 종족의 연장자 또는 승려에 의하여 행하여졌는데, 청년은 입회식의 일련의 의식(儀式)을 마치면 완전한 종족의 일원이 되었다.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동안에 청년은 종족의 비밀과 특별한 성(性)관계를 배우고, 또 그 자신의 행복과 집단 전체의 안녕에 필요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때 입회식에 나온 청년들은 곤란을 견디는 어려운 훈련을 받으면서 종족의 비밀을 보존하려는 능력을 입증해 주어야 했다.
 
한반도(韓半島)와 만주 남부에서 가장 문화단계가 빨랐던 것은 중국의 북부에서 랴오허(遼河) 방면을 거쳐서 대동강 방면으로 들어온 고조선(古朝鮮)으로, 전기에는 신석기문화였으나 후기에는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로 발전했다.그런데 교육은 인간생활 그 자체와 같이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정확히 말할 순 없다. 교육은 인류가 교육이라는 문제를 말하기 전부터 벌써 시작됐고 또 교육에 관한 서적이 나오기 오래 전에 벌써 교육에 관한 사고(思考)가 있었다.그러나 원시시대의 교육은 거의 목적의식이 없었다. 즉 원시인들의 행동은 거의 본능적 충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현재에만 얽매여서 미래에 대해 이해도 못하고 예측도 못하였다. 또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거의 생각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며, 파괴적 자연력(自然力)과 자기 이외의 인간으로부터 자기와 가족을 보호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그래서 원시인들은 교육의 첫째 목적을 '안전(安全)'에 두었다. 그들은 생물과 무생물에 공포를 느꼈다. 또 때로는 나무·암석·폭풍·천둥과 같은 모든 자연물이 생물과 같이 보이기도 했다. 자연의 신비성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만물이 다 희로(喜怒)를 하고 인간을 파괴도 하고 방임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초기 종교, 즉 물활론(物活論, animism)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물활론은 최초의 종교인 동시에 또한 인간에게 처음으로 철학을 준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사고(思考)가 발생하게 되었다.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간에 널리 퍼져 있는 샤머니즘(sham­anism)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최초 형태는 주위의 삼라만상에 정령(精靈)의 존재를 인정하는 애니미즘이라고 한다. 원시인들은 하늘의 해·달·별, 심지어 길가에 뒹굴고 있는 돌에까지도 정령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원시인들에게 매일 주어진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공포로부터 자기 생명을 보존하느냐였다.자연의 변화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압도해서 안주(安住)의 순간이 없었다. 언제나 공포가 그들의 마음속에 있고, 또 그것이 그들을 지배하였다.그러니 원시인들은 자기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교육의 기본목적을 안전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교육의 최초 동기(動機)는 공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시교육의 둘째 목적은 '단결(團結)'에 있었다. 위험에 대한 공포가 원시인들을 가족·씨족·종족(種族)으로 결합시켰고, 여기에서 단결의 문제가 나오게 되었다. 단결은 개체(個體)를 보존하고 자기 가족 및 종족을 안전하게 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시인들은 자연적으로 발생된 혈족 및 종족단체에 결부되어 생활하였으며, 또 이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였다.또 이들은 석기(石器)나 궁시(弓矢)로써 단독으로 자연력과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종족간에 공동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의 노동·분배도 종족단체의 공동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원시사회는 자급자족하는 경제적인 독립체였으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서 생산·전쟁·종교 등에 관한 중대한 일도 종족회의에서 결정했다. 따라서 원시사회는 운명공동체적인 사회였다.그러니 원시인들은 그 자신과 집단의 안전을 위해서 단체에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그 집단의 한 사람이라도 종족의 습관과 풍습에서 이탈하는 것을 용서하지 아니하였다. 그 결과, 원시교육에 있어서는 개인의식(個人意識)보다 단체의식(團體意識)이 강조되었고, 개인보다 단체의 안녕이 중요한 관심사(關心事)가 되었다.그러나 원시인들은 집단 및 단체생활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일을 연소자에게 가르치면서도 그것이 연소자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교육내용 역시 이러한 목적에 따라, 자기보존(自己保存)을 위하여 육체적 기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훈련과 자기와 종족의 안전을 위해 영혼(靈魂)을 위무(慰撫)하는 데 필요한 예전(禮典), 그리고 그들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관습·단결 등을 훈련받는 데 두었다.첫째, 원시인들은 자기보존과 육체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처음에 나무의 열매나 풀뿌리, 조개(貝)를 주워 먹는다. 때로는 먹이를 더 풍성하게 구하려는 기원도 했다. 그러다가 원시인들은 짐승과는 달리 본능적 욕구충족 문제에서, 오늘과 앞날을 위한 준비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즉 활과 낚시의 발명으로 비로소 수렵과 어로가 중요한 생업(生業)이 되었다.이에 따라 그들은 수렵·어로·전투를 익히게 되었고, 여기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며 또 이를 취급하는 법을 배웠다.
 
대개 이러한 학습은 종족의 연장자들이 소년들에게 가르쳤는데, 이로부터 기술교육이 시작되었다.둘째, 영혼을 위무(慰撫)하는 예전(禮典)은 바로 그들의 불가사의 혹은 신(神)을 진무(鎭撫)하는 의식(儀式) 제전(祭典)이었다. 원시인에게 자연의 신비성과 폭위(暴威)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기에 자연 숭배의 원시종교가 싹트고, 죽음에 봉착할 때도 원시신앙이 나타났다. 이 신앙은 여러 가지 주술적인 행위를 하여 신앙 대상을 위로하고 자기의 공포감을 덜어줄 것을 기원하는 것이 특색이었다.이러한 행동은 바로 무도(舞蹈)나 가요(歌謠)로서 나타나 예술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무섭거나 괴로운 마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예술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원시시대에 있어서 종교와 예술과 인간의 활동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신을 진정시키는 제전(祭典)은 대부분 상징(象徵)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에는 듣는 것과 보는 것의 2가지 상징이 있었다. 말하는 상징이 수적으로 늘었을 때 언어와 음악의 시작을 볼 수 있고, 자연숭배의 조상(彫像)·성단(聖壇)과 같은 시각상징(視覺象徵)의 발달로서 미술·벽화(壁畵) 등이 시작되었다.대체로 신을 위로하는 예전은 마법사·승려·사제(司祭)·무당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인간과 신의 중간에서 중매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또 때로는 질병(疾病) 역시 악한 영혼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추방하는 것도 이들이 맡았다.
 
대체로 샤먼의 기능은 아래 3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는 사제(司祭)적인 기능이요, 둘째는 예언적인 기능이요, 셋째는 치료의 기능이다. 샤먼의 무구(巫具)는 대개 방울과 북과 거울이다. 이 3가지를 선신(善神)은 좋아하고 악신(惡神)은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약(醫藥)을 무당이 맡았다는 것은 의(醫)의 고자(古字)가 의(▩)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무당을 '당굴' 또는 '단골'이라 하는 것은 당굴이 'Tengri'의 음역(音譯)으로서 그 원의(原意)가 '푸른 하늘' 또는 '제천자(祭天者)'라 함은 이미 정설(定說)이 되어 있다.셋째, 사회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관습은 그들의 연장자에게서 배웠다. 그들 사회에 필요한 관습의 훈련을 잘 받지 못한 연소자는 무조건 축출당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종족의 단결에는 종족의 습관과 풍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시교육은 개성의 차이를 개발하지 않았을뿐더러, 그것을 억제해서 종족의 성원을 불변케 하는 관습의 선(線)에 머무르게 했다.그러므로 종족간에 필요한 관습을 배우는 것은 그들 종족의 성원이 되는 자격이며, 종족 성원으로서의 특권은 이것을 수수(授受)하는 데 의하여 결정되었다.
 
종족의 결합에서 나온 이런 관습은 그들에게 사회상속이 되었는데 그 후에도 수세기 동안 원시 교육에서는 이런 상속을 연소자들에게 강제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관습 즉 사회상속은 그들 종족의 현상 유지에 필요한 규칙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원시인들은 신체 훈련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아(幼兒)에게는 공포심을 가지지 않게끔 하기 위하여 사람을 구타하는 법을 가르쳤고, 소년에게는 몸을 전후 좌우로 민첩히 움직이는 법과, 자기를 표적(標的)으로 하여 쏘는 창이나 화살을 피할 수 있게끔 훈련하였다. 그리고 청년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구타를 참고 견디는 훈련을 했고, 이와 아울러 용감한 행동을 하게끔 상무심(尙武心)을 북돋아 주었다.
 
이러한 신체 훈련은 그들의 적인 동물이나, 인간 대 인간의 생존경쟁에서 그 자신과 종족을 보호하고 또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행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체육교육은 이미 원시시대부터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원시시대의 교육방법은 극히 자연적인 모방(模倣)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 아이는 어머니의 역할을, 남자 아이는 아버지의 역할을 모방했다. 그러나 소년이 아버지의 역할을 익혔을 때 교육 역시 끝이 나는 것이었다. 아동의 완구(玩具) 역시 어른이 사용하는 도구 즉 창·활·화살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원시인의 교육방법은 시행착오법(試行錯誤法)을 사용했다.그러나 이것은 종족의 습관과 금기(禁忌)·예전(禮典) 등의 생활풍속에 저촉되지 않는 행동에 있어서만 그러한 교육방법이 허용되었다.이 밖에도 원시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행사는 청년기의 입회식(入會式)이다. 그 목적은 종족 청년을 가치있는 사회일원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 일은 종족의 연장자 또는 승려에 의하여 행하여졌는데, 청년은 입회식의 일련의 의식(儀式)을 마치면 완전한 종족의 일원이 되었다.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동안에 청년은 종족의 비밀과 특별한 성(性)관계를 배우고, 또 그 자신의 행복과 집단 전체의 안녕에 필요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때 입회식에 나온 청년들은 곤란을 견디는 어려운 훈련을 받으면서 종족의 비밀을 보존하려는 능력을 입증해 주어야 했다.
 
==고조선의 성립과 교육적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