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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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년]] [[8월 25일]] [[십상시]]들은 [[하태후]]의 명령을 위조해 [[하진]]을 [[장락궁]]으로 불러들이고 [[하진]]은 결국 [[십상시]]들과 상방감 [[거목]]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에 [[하진]]이 죽자 하진의 부하 오광이[[오광 (후한) |오광]]이 청쇄문 밖에 불을 질렀고 진군교위 [[조조]]와 사예교위 [[원소 (삼국지)|원소]]는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고 [[원소 (삼국지)|원소]]의 동생 [[원술]]도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여하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
 
취화루 아래에서 조충, 정광, 하운, 곽승 등이 베이고 군사들은 [[십상시]]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으며 [[환관]]들도 모두 살해했는데 이 때문에 수염 없는 사람들도 [[환관]]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했다. [[하진]]의 동생 [[하묘]]도 난입해 십상시 중 한 명이던 조충을 죽였으나 오광에게 가담자로 오해받아 살해당했고 [[하진]]을 살해했던 상방감 [[거목]]을 포함해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장락궁]]에서 살해당해 십상시의 난이라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