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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년]]([[조선 경종|경종]] 3)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이듬해 설서(設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조선 영조|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되어
[[1741년]](영조 17)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 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 목사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均稅使)를 거쳐 판의금부사·세손사부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인 [[의소세손]]이 죽자 약방제조로 책임을 추궁 받아 제주도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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