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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이승만]]이 피난하자 [[신익희]]와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 [[경무대]]로 갔다가 이승만의 도피소식을 접하였다. [[신익희]]는 측근들과 함께 가자 해놓고 가족들과 먼저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한 반면,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킨 뒤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의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아내 [[김조이]]는 차마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 이때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문건이 담긴 포스터와 방이 붙여져 있었다. 뒤늦게 야밤에 [[대전광역시|대전]]으로 내려오자, [[이승만]]은 [[공산당]]과 내통하였다더니 내려왔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2년]]에는 다른 야당인사들과 함께 [[이승만]]을 실각시키려는 내각제 개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카드로 [[5월 15일]]부터 [[7월 일]]까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반(反)[[이승만]]의 기치하에 모였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죽산 조봉암은 이때부터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을 찾아가 함께 자신과 함께 신당운동을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장면은 한번에 거절하였다. [[장면]]이 조봉암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조봉암의 정치노선이 탐탁치탐탁지 않다는 것과, 신당운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뒤 [[대한국민당]]을 탈탕하고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2대 대통령 선거]]에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ref>[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7/08/021109000200708160673036.html 한국에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한겨레 21 2007년 8월16일 제673호]</ref>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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