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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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표회의 내 갈등===
====창조파와 개조파====
 
1923년 3월 9일 본회의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 제의안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회의는 크게 '''창조파(創造派)''', '''개조파(改造派)'''로 분열되었다. 먼저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을 대신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입장으로 [[북경]]과 [[노령]]에 기반을 둔 [[신숙]]·[[문창범]]·[[윤해]] 등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반임시정부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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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f607f;" align="center"
|colspan="5" |'''시국문제 입장별 대표수''' <ref>이동휘, 제3공산주의인터네셔널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보고, 1923;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56쪽 재인용</ref>
|-style="background:#ff9b00;"
|그룹명칭
|대표총수
|그중 공산주의자
|향후참가거부
|그중 공산주의자
|-
|개조파
|57
|23
|57
|23
|-
|창조파
|32
|13
|0
|0
|-
|중립파
|7
|7
|7
|7
|-
|대회 중간 소환
|19
|6
|19
|6
|-
|대회분열 뒤 불참
|4
|2
|4
|2
|-
|국민위원회 조직 때 탈퇴
|6
|3
|6
|3
|-
|총계
|125
|54
|93
|41
|}
1923년 3월 9일 본회의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 제의안에제의안(시국문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회의는 크게 '''창조파(創造派)''', '''개조파(改造派)'''로 분열되었다. 먼저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을 대신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입장으로 [[북경]]과 [[노령]]에 기반을 둔 [[신숙]]·[[문창범]]·[[윤해]] 등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반임시정부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반면 노선의 일치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모인 '''개조파'''의 [[여운형]]·[[김동삼]]·[[안창호]] 등은 [[상하이]]와 [[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0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