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실로프 공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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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왕은 트렌티노 방면을 강압하고 있은 오스트리아군을 흡수하기 위하여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하여 줄 것을 러시아황제에게 간청하였다.
이에 러시아황제는 군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남 집단군은 6월4일에 양공을, 서부 집단군은 6월14일에 주공을 개시하도록 명력하였다. 이리하여 맹장 브루실로프는 휘하 50개사단을 4개군으로 편성하고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브루실로프 전면의 독일군은 대부분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였고, 중포의 대부분과 강력한 수 개의 오스트리아 사단은 이탈리아 전선으로 차출되어 당시에는 콘라드 장군이 지휘하는 보병37개사단과 기병9개사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그리고 이들은 방어진의 견고함을 믿고 있었다.
 
6월4일 단시간의 기습적인 준비포격 후 브루실로프의 보병이 일제공격을 시작하였을 때 오스트리군의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브루실로프군의 우익 제 8군은 오스트리아 제 4군과 제 2군의 간격을 돌파하여 6월10일에 루츠크를 점령하고 80km의 돌파구를 이루었으며, 좌익의 제 9군은 체르노빗츠 북방을 공격하여 프루드 강에 도달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제 4군과 제 7군이 격파당하고 중앙의 제 2군과 남부군만이 렘베르크 전방의 방어진을 확보하고 있었다.
 
6월말에 이르러 브루실로프군은 우익에서 교통중심지 코벨과, 좌익에서 카르파티아 통로를 위협하고, 동맹군에게 70만이상의 손실을 주었다. 러시아군이 1915년에 결정적으로 패퇴되었으리라 믿고 베르됭 공세에 주력하고 있었던 독일군에게는 이 사건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장군은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모든 가용병력을 집결시키고 서부전선으로부터 4개사단, 트렌티노 방면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 2개사단을 증원받고,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돌파된 전선의 봉쇄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기동력이 부족한 러시아군은 우수한 철도망을 이요하여 급속도로 증원되어 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동맹군은 서부전선에서 15개사단, 이탈리아전선에서 8개사단, 그리고 국내와 북부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전선을 보강하였으나 러시아군은 13개사단밖에 증강하지 못하였다.이리하여 9월말까지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브루실로프 공세는 무기력해져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동안 러시아군은 350000명 이상의 포로와 많은 물자, 그리고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였지만 러시아군 자체의 손실이 1000000명을 넘어 그 전투력은 약화되었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한편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막대한 병력을 잃어 독일의 지원 없이는 이 이상의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도 베르됭 지역에서 15개사단을 전용함으로써 서부전선에서 오히려 수세로 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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