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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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려가요는 몽고 침략 이후 궁중을 중심으로 보존된 것으로 문학적인 면으로 볼 때에는 아름다운 해조(諧調)를 이루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우리 노래였기 때문에 한문학자나 위정자들은 이를 무조건 폄시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참다운 국문학(國文學)이었고 그 문학적 향기는 높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를 국문학의 암흑기로 다루고 있는 분도 있으나 이는 정당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난고]](益齋亂藁)> 중에 <소악부(小樂府)>로 한역(漢譯)된 작품이 11수가 있고,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30여 편의 가명(歌名)과 그 해설이 실려 있다. 또 현존하는 작품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동동]](動動)> <[[정읍사]](井邑詞)> <[[정과정곡]]> <[[처용가]]> 등 4편이 수록되어 있고, <[[악장가사]](樂章歌詞)>에는 <[[만전춘]](滿殿春)> <[[청산별곡]](靑山別曲)> <[[서경별곡]](西京別曲)> <[[정석가]](鄭石歌)> <[[사모곡]](思母曲)> <[[어부가]](漁夫歌)> <[[가시리]]> <[[이상곡]](履霜曲)> <[[쌍화점]](雙花店)> 등 9편과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유구곡]](維鳩曲)> <[[상저가]](相杵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속요(俗謠)는 유명인에 의한 창작적 가요도 있지만 한편 각 지방의 군악(郡樂)이 궁중에 올라와서 궁중무악으로 승화한 것도 있어 그 형태는 다양해서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安軸作),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이른바 일명 '[[경기체가]](景幾體歌)'라고 불리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통일된 형태는 없는 것 같다. 다만 분장(分章) 형태와 여음(餘音)이 많은 것으로 보아 민요적인 색채가 짙다. 이 여음은 '메김소리'와 '받음소리'가 가지는 형태와 흡사하고 또 이것이 다양하다는 것은 무악(舞樂)과도 응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고려가요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유가(儒家)에서 배척할 만큼 여기에는 아무 구김살 없이 인간 애욕의 순수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려인다운 회의와 도회가 <청산별곡(靑山別曲)> 등에 스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충렬왕]] 이후 역대 왕들이 놀이를 좋아하여 궁중무악을 즐겼던 탓으로 이런 사랑의 노래가 궁중에도 스며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이 사상과 유악(遊樂)의 긍정은 조선조 [[사대부]]들이 표면상으로 기피하였던 일이다. 한편 고려가요 중 그 명칭이나 한역시 또는 해설만이 전하고 알맹이가 전하지 않는 작품들도 허다하다. 고려 일대라고 문학적으로 아주 요요(寥寥)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단가시형(短歌詩形) [[시조]]를 창제해서 조선에 넘겨주고 시화류(詩話類) 등 패관문학과 '[[가전체]](假傳體)'류를 조선조선에 넘겨주어서 면면한 한국문학사 가운데 고려의 위치도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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