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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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보통학교 교원을 거쳐 금산지방법원 서기, 김응섭(金應燮) 법률사무소 상주출장소원을 지냈다.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4년]]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고관들을 저격하고자, [[1923년]] [[12월 20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31일 후쿠오카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바야시 간이치(小林貫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ref name="약산 김원봉 평전">{{서적 인용
| 저자 = 김삼웅
| 제목 = 약산 김원봉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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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1924년 [[1월 3일]] [[도쿄]]에 잠입하였으나.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궁성(宮城)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지기로 했다. [[1월 5일]] 왕궁진입을 시도하며 폭탄을 던졌으나 3개 모두 불발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ref name="약산 김원봉 평전"/>
 
그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 name="약산 김원봉 평전"/> 그러나 [[1928년]] 2월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복역 중 의문의 죽음으로 순국하였다.<ref name="약산 김원봉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