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복건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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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걸복건귀는 [[선비족]] [[걸복부]] 출신으로 [[걸복국인]]의 동생이다. 걸복국인이 서진을 건국하자 걸복건귀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다. [[388년]]에 걸복국인이 죽자 그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대신 뒤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금성(金城, [[간쑤 성]] [[란저우 시]])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에는 [[전진 (오호십육국)|전진]](前秦)의 [[부등]](苻登)에 의해 금성왕(金城王)에 책봉되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금성(金城, [[간쑤 성]] [[란저우 시]])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에는 [[전진 (오호십육국)|전진]](前秦)의 [[부등]](苻登)에 의해 금성왕(金城王)에 책봉되었다.
농서(隴西) 일대에서 할거하던 걸복건귀는 [[394년]]에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면서 양왕(梁王)에 책봉하자 1만의 기병을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곧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苻崇)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하였다. 이에 부숭은 [[구지]](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켰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하였다.
 
농서(隴西) 일대에서 할거하던 걸복건귀는 [[394년]]에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면서 양왕(梁王)에 책봉하자 1만의 기병을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걸복건귀는 서성(西城, [[간쑤 성]] [[징위안 현 (바이인 시)|징위안 현]])으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후량 (오호십육국)|후량]](後凉)의 공격을 받아 [[397년]]에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400년]]에는 원천(院川)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후진 (오호십육국)|후진]](後秦)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하였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농서(隴西) 일대에서 할거하던 걸복건귀는 [[394년]]에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면서 양왕(梁王)에 책봉하자 1만의 기병을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곧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苻崇)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하였다. 이에 부숭은 [[구지]](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켰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南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요흥]](姚興)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였으며, [[401년]]에는 옛 본거지였던 원천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후진의 장군으로 걸복건귀는 후량 공략, 토욕혼 공략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요흥은 걸복건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주객상서(主客尙書)로 삼았다. 걸복부는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대신 통솔하였다.
 
걸복건귀는 서성(西城, [[간쑤 성]] [[징위안 현 (바이인 시)|징위안 현]])으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후량 (오호십육국)|후량]](後凉)의 공격을 받아 [[397년]]에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400년]]에는 원천(院川)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후진 (오호십육국)|후진]](後秦)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하였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409년]]에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뒤 걸복건귀는 걸복공부에게 살해되었다.
 
[[400년]]에는 원천(院川)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후진 (오호십육국)|후진]](後秦)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하였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南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요흥]](姚興)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였으며, [[401년]]에는 옛 본거지였던 원천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걸복건귀는 [[남량]](南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요흥]](姚興)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였으며, [[401년]]에는 옛 본거지였던 원천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후진의 장군으로 걸복건귀는 후량 공략, 토욕혼 공략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요흥은 걸복건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주객상서(主客尙書)로 삼았다. 걸복부는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대신 통솔하였다.
 
[[409년]]에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뒤 걸복건귀는 걸복공부에게 살해되었다.
 
[[41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사이 걸복공부에게 살해되었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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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오호십육국시대 사람]]
[[분류:412년 죽음]]
[[분류:암살된 사람]]
 
[[en:Qifu Gangu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