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쇼클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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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illiam Shockley, Stanford University.jpg|thumb|220px||윌리엄 쇼클리{{노벨상 딱지}}]]
'''윌리엄 브래드퍼드 쇼클리''' (William Bradford Shockley [[1910년]] [[2월 13일]] - [[1989년]] [[8월 12일]])는 [[미국]] [[물리학자]]이다. [[존 바딘]], [[월터 브래튼|월터 하우저 브래튼]]과 함께 [[트랜지스터]]를 공동 발명했고 [[1956년]] P·N 접합의 전자론적 연구 등 전자 연구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새로운 트랜지스터 디자인을 상업화하려한 그의 노력은 [[실리콘 밸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과학적 업적 이외에 [[우생학]]적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때문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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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소 괴팍한 지도 스타일은 벨 연구소에서 그가 경영진으로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는 연구자, 이론가로서만 평가받았다. 쇼클리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권력과 이득을 원했으며, 따라서 그는 벨 연구소를 [[1953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돌아간다.
 
마침내 그는 대학동창의 전자회사의 한 부서로, 독립적인 그룹을 이끌게 됐다. 1955년에 그는 [[Beckman Instruments]]에Instruments에 취직했고, 거기서 Beckman의 새로운 부서인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이끌게 된다. 쇼클리는 자신의 명성과 Beckman의 자금을 이용해서 벨 연구소에서 일하는 옛 동료들을 자신의 연구소로 데려오려 했으나, 아무도 쇼클리의 연구소로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쇼클리는 대신 "자기식"으로 일할 회사를 처음부터 만들기 위해 대학을 돌며 뛰어난 졸업생을 찾아다녔다.
 
쇼클리의 "자기식"은 요약하자면, "독재적 지배와 심해지는 편집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쇼클리의 비서가 엄지손가락을 다쳤는데, 쇼클리는 이것이 자기를 독살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하고는,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해서 범인을 찾도록 요구했다. 나중에 이 사건의 원인은 부러진 압핀이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이때부터 연구원들이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가 요구한 소자(오늘날 [[쇼클리 다이오드]]라고 알려진 소자. 그 당시에는 새롭고,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소자였다)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는 매우 느리게 진행됐다.
 
1957년 말, 쇼클리의 회사에 있던 연구원 8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페어차일드 카메라와 기계 회사]]로 옮겨가서 반도체 사업부를 만들었고, 쇼클리는 이들은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배신자 8인]]"은'에는 나중에 페어차일드를 떠나 [[인텔]]을 차린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도 있었다. 인텔뿐만 아니라, [[내셔널 세미컨덕터]]와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도 페어차일드에서 갈라져나온 회사이고, 이런 움직임이 바로 실리콘벨리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쇼클리 세미컨덕터는 쇼클리를 부자로 만들어주지 않았고, 이익을 내지도 못했다.
 
1956년부터 스탠퍼드에서 30명 정도 사람들이 한번씩 모임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쇼클리와 함께 보냈던 시간, 그리고 정보기술혁명에 쇼클리가 공헌한 점에 대해 회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