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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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5월 20일]], 검찰은 자수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원 [[전우겸]]의 진술을 받아 국회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를 구속하였다. 혐의는 남로당과 연계하여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 [[1949년]] [[5월 21일]], [[대한민국 국회|국회]]는 임시국회를 소집하고 이들 의원에 대한 석방결의동의안을 상정하였으나 부결되었다.(184명 투표, 가 88, 부 95, 기권 1)
* [[1949년]] [[6월 10일]], 월북을 시도한 남로당의 여성 특수공작원 정재한이[[정재한]]이 [[개성시|개성]]에서 검거되었다. 검·경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정재한의 음부에서 발견된 암호로 엮어진 문서가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를 계기로 [[6월 20일]]부터 다시 수사망을 통해, [[6월 21일]] 국회의원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병회]], [[6월 25일]] 국회부의장 [[김약수]], 8월 10일과 16일에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오택관]]을 구속하고, [[8월 16일]]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첫 공판은 [[1949년]] [[11월 17일에17일]]에 열렸다. 그러나 노일환 등의 국회의원을 구속하게 된 유일한 증거가 된 여성 특수공작원 정재한은 피고인들과 변호인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ref>〈제헌국회프락치사건의 진상 1〉, 《민족통일》 1989년 1·2월호, 53쪽.; 《이것이 국회다》, 이호진, 강인섭, 삼성출판사, 88~89쪽.</ref>. 당시 미대사관 문정관으로 근무하던 핸더슨은 이 사건을 조사·방청한 결과 정재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ref>〈우리역사 바로알자 국회프락치사건, 사실인가〉, 박원순, 《역사비평》 1989년 가을호(통권 8호), 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사).</ref>.
*[[1950년]] 2월 10일 14차 공판(구형공판)에서 서울지검([[오제도]]·[[선우종원]] 검사)은 14명 전원에게 최고 징역 12년형에서 최하 2년형까지 구형되었다. [[1950년]] [[3월 14일]] 15차 공판(선고공판)에서 서울지방법원([[사광옥]] 판사 주심, [[박용원]]·[[정인상]] 판사 배심)은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이문원]]·[[노일환]] 징역 10년, [[김약수]]·[[박윤원]] 징역 8년, [[김옥주]]·[[강욱중]]·[[황윤호]]·[[김병회]] 징역 6년, [[오택관]] 징역 4년, [[이구수]]·[[최태규]]·[[신성균]]·[[서용길]]·[[배중혁]]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심시를 진행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탈주하면서 사건이 종료되었다<ref>《서울지방검찰사》, 서울지방검찰청, 1985.</ref>.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되었다는 지적도 있다<ref>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김삼웅, 가람기획, 1998., 12쪽.; 〈출발부터 휘청거리는 의회정치〉《한국현대사이야기주머니 1》,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지음, 녹두, 1993., 159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