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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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부터 [[7세기]]의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지만, 신라는 두 나라에 압박받고 있었다. 왜는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지배했던 적이 있다고 『[[일본서기]]』에 서술되어 있으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검증이 필요하며 학계에서 논쟁이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왜가 임나, 가야와 관계가 깊다는 사실은 거의 분명하다. 이 지역은 호족에 의해 백제로 할양되고 신라의 진출에 의해 약화되어,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한편, [[581년]]에 건국된 [[수나라|수]]는 [[대륙]]을 통일하여 [[양견|문제]]・[[양제]]의 치세에 4번에 걸친 대규모의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나 실패해, 이것이 세력이 약화된 유력한 원인이 되어 [[618년]]에 수 양제가 살해되면서 멸망했다. 같은 해에 건국된 [[당나라|당]]은 628년에 국내를 통일한 후, [[태종 (당)|태종]]・[[고종 (당)|고종]]의 시기에 고구려를 3번(644년~648년)에 걸쳐 공격했지만 수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신라는 627년에 백제에 의해 공격받을 때, 당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때는 당이 한창 내전을 치르고 있던 중이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고구려 원정에서 고구려・백제가 당에 맞서 적대적이 되어 당과 신라와의 관계가 친밀해져, [[선덕여왕]](632년~647년)의 휘하에 실력자로 있던 김춘추(나중에 태종[[무열왕]])는 적극적으로 친당 정책을 펼쳤고, [[654년]]에 무열왕(~661년)으로 즉위하자 양국 관계는 보다 더 친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