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군 (163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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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군 이사'''(寧平君 李泗, 1636년1631년 - 1721년1722년)은 조선후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증손이며, 종실 [[진양군 (왕족)|진양군]] [[이담령]](珍陽君 李聃齡)의 2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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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군 이사'''(寧平君 李泗, 1636년 ∼ 1721년)은 조선후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증손이며, 종실 [[진양군 (왕족)|진양군]] [[이담령]](珍陽君 李聃齡)의 2남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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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충의위(忠義衛) 평양인(平壤人) [[조림]](趙琳)의 딸로 현부인 평양조씨(縣夫人 平壤趙氏)이다.
 
진양군의 2남으로 병자(丙子) [[1636년1631년]](인조 149) [[3월 11일]] 탄생하였다. 초수 영평수(寧平守)에 책봉되고, 영평정(寧平正)에 봉작되었다가 승헌대부(承憲大夫) 영평군(寧平君)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봉작받고 신축(辛丑) [[1721년1664년]](경종현종 15) [[4월9월 4일19일]] 향년어제 86세로환궁(還宮) 별세하여 경기도때에 가평군수가(隨駕)하지 설악면않았다고 회곡리종부시(宗簿寺) 어헌동제조(提調)가 신좌로종중추고(從重推考)를 예장하였다청하였다.
 
[[1669년]](현종 10) [[2월 3일]] 사은(謝恩)받았고, 이해 [[2월 15일]] [[조선 현종|현종]]이 종실(宗室) 친림(親臨) 전강(殿講) 때 중략(中略)의 성적을 받았으며, 이해 [[2월 19일]] 전강(殿講)에 입격하여 승급(陞級)되고, 이해 [[2월 20일]] 사은(謝恩)받고, 영평정(寧平正)에 책봉되었다.
 
[[1676년]](숙종 2) [[4월 12일]] 영의정 [[허적]](許積) 등과 주강(晝講)에 입시하여 동지사 [[홍우원]](洪宇遠)을 실록찬수(實錄纂修)에 전념시키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조선 숙종|숙종]]이 인견할 때 영평정이 상소(上疏) 하길 "국가가 앞에는 양송(兩宋, [[송시열]]과 [[송준길]])에서 그릇되었고 뒤에는 허(許)·윤(尹)에서 그릇되었는데, 전하께서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으시는 것은 예(禮)를 의논한 한 가지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 한 가지 일로써 어질다고 일컬어서, 초야(草野)에서 천거하여 백성 위에 놓을 수 있습니까? 윤휴에 관해서는 신이 그 사람됨을 아니, 평생에 하는 바가 결단코 바른 사람이 아닙니다.”하였다. 또 당론(黨論)의 폐단을 지극히 논하였는데, 그 더욱 심한 자를 죽여서 그 나머지 사람을 힘쓰게 하기를 청하였고, 또 ‘능제(陵祭)에 소(素)를 쓰는 것이 예(禮)가 아니라는 것과, 서원(書院)의 긴요하지 아니한 것은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과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장수를 얻는 데 있다는 것과, 복수(復讐)는 장차 나라에 화(禍)를 입힌다는 것과, 병거(兵車)의 마땅치 못함과, 지패(紙牌)가 때에 맞지 아니함과, 성역(城役)은 민원(民怨)을 초래한다는 것과, 만과(萬科)가 군액(軍額)을 줄이는 것 등을 아뢰었으나 숙종과 영의정 허적은 종신(宗臣)으로서 조정의 일을 참여해 논하고, 대신(大臣) 우의정 [[허목]](許穆)과 좌참찬 [[윤휴]](尹鑴)을 배척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ref>숙종 5권, 2년(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4월 12일(갑자) 1번째기사 </ref>
 
이해 [[4월 13일]] 이 일로 대사헌(大司憲) [[목내선]](睦來善)이 삭탈 관작(削奪官爵)을 청하였고, 이해 [[4월 15일]] 숙종이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이 성(城)을 나간 것을 듣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효유(曉諭)하여 함께 오게 하고, 인해서 영평정(寧平正) 이사(李泗)를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라 명하였다.<ref>숙종 5권, 2년(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4월 15일(정묘) 1번째기사</ref> 이 일로 허목과 윤휴는 조정에 나오지 못하였고, 그 일파들이 계속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숙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허적(許積) 등이 계속 허목 등 배척 당한 것에 얘기하자 끝내 이해 [[4월 19일]] 용천(龍川)에 정배(定配)되었다가 이해 [[6월 17일]] 허목이 차자를 올려 영평정 이사의 정배를 말함으로써 숙종이 드디어 가까운 도(道)로 옮기기를 명하였으므로 금부(禁府)에서 사(泗)를 파주(坡州)에다 정배(定配)하자, 숙종이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중간이 되는 도(道)로 바꾸기를 명하여 곧 아산(牙山)에 옮겨 정배되었다.<ref>숙종 5권, 2년(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6월 17일(무진) 1번째기사</ref>
 
이해 [[6월 21일]] 대사헌 윤휴가 상소하여 언로(言路)를 끊었다고 상소하고, [[1677년]](숙종 3) [[2월 9일]] 대사헌 [[이지익]](李之翼)의 건의와 허목의 상소로 정배를 풀어주었다.
 
[[1678년]](숙종 4) 윤3월 4일 사은(謝恩)받았고, [[1679년]](숙종 5) [[8월 16일]] 이정선록(釐正璿錄)을 도로 거두워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일로 해서 그 소두(疏頭)라 하여 파직되었다가 서용(敍用)되었다.
 
[[1680년]](숙종 6) [[5월 20일]] 사은(謝恩)받고, [[1682년]](숙종 8) [[2월 29일]] 사은(謝恩)받았다.
 
[[1683년]](숙종 9) [[6월 2일]] 직첩환급(職牒還給)되었다가 이해 [[6월 19일]] 서용(敍用)되었다. [[1705년]](숙종 31) [[9월 13일]] 주강(晝講)에 유득일(兪得一) 등이 입시하여 종반(宗班) 중에서 70살 이상이 된 사람을 가자(加資)하는 문제에 논의되고, 영평정은 이때 75세였다. 이해 [[9월 19일]] 가자숙배(加資肅拜)하였다.
 
[[1711년]](숙종 37) [[5월 27]] 다시 80살이 된 종반 가자 문제에 대해 논의되어 이해 [[6월 10일]] 영평군(寧平君)에 책봉되었다.
 
[[1722년]](경종 2) [[1월 22일]] 승헌대부(承憲大夫)에 가자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받고, 이해 [[4월 4일]] 향년 92세로 별세하여 이해 [[9월 15일]] 양근 서종면 노문리 이치 어은동 즉 현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어헌동 신좌로 예장하였다.
 
*참고로 선원속보에는 생몰년이 1636년 - 1721년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승정원일기 나온대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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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녀 : 해주인(海州人) [[정래상]](鄭來祥)에게 출가.
 
==주석==
{{토막글|}}
<references/>
[[분류:1636년 태어남]]
 
[[분류:1721년 죽음]]
[[분류:1636년1631년 태어남]]
[[분류:1721년1722년 죽음]]
[[분류:조선 사람]]
[[분류:조선의 왕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