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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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otega Rzeczypospolitej u zenitu Zlota wolnosc Elekcja 1573.JPG|thumb|400px|right|첫 폴란드 왕위 선거였던 [[1573년]] [[앙리 3세|헨리크 발레지]]의 국왕 선출. [[얀 마테이코]] 작품.]]
[[Image:Plan of the elective camp of Polish Kings in Wola near Warsaw.PNG|thumb|300px|right|바르샤바 근교 보라에서 열린 폴란드 왕 선거회장의 플랜.]]
[[Image:Jean-Pierre Norblin de La Gourdaine 001.jpg|thumb|400px|right|바르샤바 외곽 보라에서 열린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2세 강건왕]]의 선거 ([[1697년]]). [[베르나르도 벨라토]]의 작품.]]
 
'''자유 선거'''(Free election; {{llang|pl|wolna elekcja}})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실시되었던실시된 [[국왕]]을 혈통상의 권리가 아닌 개인적 자격에 의해 선출하기 위한 선거 제도이다. 1572년부터 1791년까지 실시했으나 [[1791년 5월 3일 헌법]]의 성립과 더불어 폐지되었다.
 
국왕 선거의 실시는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Grand Duke) [[요가일라]](Jogaila) 폴란드의 제2폴란드 왕조의제2왕조의 시조로써 폴란드 왕에 선출된 것이 실제 시초였다. 이 선거제 원리는 2세기 반에 걸쳐 계속된 [[야기에우오 왕조]]의 통치기간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새로운 통치자를 승인하는 정도의 의미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1572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Zygmunt II August)가 아이를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야기에우오 왕조]]는 단절되었다. [[공위 기간]](interregnum)이 시작되자 연방의 존속을존속에 불안하게불안을 느낀 정치계급([[슐라흐타]])은 새로운 왕을 미정한 채 아래의 약속에 합의했다. 즉, 주권을 국교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석 대주교에게 넘겨주고, ''인테레크스''(interrex; 라틴어: 공위기간의 섭정)이 되는 것. 귀족의 조직인 [[콘페데라치아]]({{llang|pl|konfederacja}}; [[연맹]])가 각 지역의 통치 임무를 인수받는 것. 그리고 1573년 성립된 "[[바르샤바 연맹]]"(Warsaw Confederation) 협약에 의해 국내의 다종교의 공존을 인정해 평화를 지키는 것 등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차기 국왕을 선거로 선택하고, 최종적으로 [[소집 의회세임]](sejm konwokacyjny)에 의해 승인하는 것이었다. 선거의 도입은 [[대법관]](great chancellor)이며 [[헤트만]](hetman)인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 남부 귀족들의 주도로 결정되어이루어져 선거권은 투표를 바라는 모든 남성 [[슐라흐타]](귀족, 참정권자)에 주어지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귀족들은 각 지방([[보이보드보]];voivodship)에서 투표를 실행하고, 지방선출의지방에서 선출된 [[대의원]](deputies)이 각 후보의 투표수를 [[세나트]](senate; 연방 원로원)에게 전했다. 원로원 의장이 국왕의 선출을 포고하고, 수석 대주교가 새로운 왕에게 축복을 주었다내렸다.
 
국왕선거는 바르샤바 교외의 비엘카보라(Wielka Wola; 현재 시가지의 서부, [[보라]] 지구)에서 열렸다. 가장 불온한 선거는 1575년과 1587년의 선거로 지지자가지지자와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언쟁이 일어났다. 선출과정이 끝나면 선거왕은 [[파크타 콘벤타]](pacta conventa;라틴어:"협정의 승인")라고 부르는 자신이 국사행위에 관련해 스스로 따르는 상세한 계약을 선거인인 귀족들과의 사이에서귀족들과 맺는 것을 의무로서 부과 받았다. 이 계약내용에는 최초의 선거왕이었지만 잠시 통치(자신의 형인 프랑스 왕 [[샤를 9세]]가 죽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몰래, 밤에 몰래 폴란드에서 도망쳐 프랑스로 갔다.)했던 [[앙리 3세|앙리 드 발루아]](Henri de Valois; 폴란드 이름은 헨리크 발레지(Henryk Walezy)의 이름에서 연유한 "[[헨리크 조항|헨리 왕의 조항]]"(King Henry's Articles; {{llang|pl|artykuly henrykowskie}})이라고 불리는 사항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야기에우오 왕조 최후의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1529년 ''비벤테레게''(vivente rege; 라틴어:"전 국왕의 생존중에" 차기 후계자를 결정하는 제도)에 의해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1660년 경 [[얀 2세 카지미에슈]]의 왕비 [[루드비카 마리아 곤자가]](Ludwika Maria Gonzaga)도 이 제도를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이 절차를 노리는 것은 국왕의 정치권력의 존속성을 높이고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