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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자신이 [[1881년]](고종 18년) 음력 12월에 국내외의 정세를 통찰하던 기사와, [[임오군란]] 및 그 영향 등을 썼고, 갑신년(1884년) [[음력 10월 30일]] [[우정국]] 낙성식으로부터 정변의 시작·경과 등 [[음력 12월 6일]]까지의 기사를 상세히 기술하였으며, 필사본으로 된 것을 한장(漢裝)하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비장하고 있다.
 
== 진위 논란 ==
2006년 11월 12일, 강범석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명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하여 《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일기가 아닌 일본인이 쓴 위작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다.
 
* 일본식 한문체로 쓰여졌다.
* 일본 공사가 한성에 부임하기 이전의 기록이 그 이후에 비해 빈약하다.
* [[김옥균]]은 《갑신일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 우정총국 축하연에 참석한 [[서광범]]이 좌석도에 그려져 있지 않다.
* [[고종황제]]의 '日使來衛(일본공사는 와서 호위하라)'는 발언이 일본식 번역을 거쳐 '日本公使來護朕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지켜라)'로 바뀌어 기술되었다.
*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진술을 일본인이 기록한 《조선갑신일기》라는 책이 있었고, 이를 참고로 하여 [[후쿠자와 유키치]]가 저술한 《[[메이지]] 17년 조선 경성변란의 시말》이 《갑신일록》의 내용과 문체, 기술 방식 등에서 일치한다.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는 이 주장을 아직 정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