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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조선 수군의 재건 ===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숱한다수의 장병들이장병과 전사하고,대부분의 전선도전선을 대부분 잃었으며잃고, 조선은 해상권을 완전히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조선 선조|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조선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추가되어 13척으로13척이 늘었지만, 일본군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되었다.
 
하지만 워낙 칠천량의 패배의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한때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나이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은 감히 저희들을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자신 있게 수군 폐지 불가론을 펴는 바람에 수군 폐지론은 잠잠해졌다펼쳤다.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과 병장기를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다옮겼다.
 
=== 일본 수군의 기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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