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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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긴 이튿날인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200여 척이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들어섰다. 이 중 70여 척이 입구 쪽에 남고 나머지 133척이 해협으로 진입했다. 이때 해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이 해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조선 수군 13척의 전선도 해협으로 들어서서 일본 수군을 맞이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군 일부가
이순신은 구루지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령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구루지마는 격전의 와중에 전사했다. 잘린 구루지마의 목은 기함에 높이 걸렸고, 조선 수군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그 목이
거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일본 수군을 덮쳤다. 오후가 되자 해류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거꾸로 조선 수군이 순조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었다. 지휘관을 잃고, 해류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너무 좁은 해역에 많은 배가 들어서는 바람에 뒤로 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아 일본 수군의 군함들은 마구 엉키었다. 조선 수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격전과 충파를 거듭했고, [[판옥선]]에 비해
오후
=== 결과 ===
일본군의 전선 333척 중 31척이 격침되었고, 90여 척이
이 전투 이후 일본 수군을 사실상 전의를 상실하고 최후의 [[노량해전]]까지 2년간 거의 해전을 벌이지 않았다. 명군의 강화 의지도 전선을 소강상태에 빠지게 한 이유 중 하나였다.
=== 승리의 원인 ===
조선 수군의 승리의
일본군 전함은 첨저선으로 뱃머리가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타케부네]](安宅船)고, 조선군의 전함은 뱃머리가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컸다. 뱃머리가 둥글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회전이 용이하였고, 반면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되는 결과를 가져와 배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고,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되었다. 조선 수군은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 충각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부서뜨리는 돌격전법도 자주 구사했던 것도 이러한 배의 특성 덕분이었다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또한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과 병사들의 사기도 승리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순신이 철쇄(쇠사슬)를 전투에 사용했다고 하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역사스페셜|KBS 역사스페셜팀]]》은
{{인용문|수중 철쇄(쇠사슬)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져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
그러나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난중일기]]》 음력 9월 16일자를 제시한다. 그 부분을 보면 “왜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또,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기록은 과장이 많아,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철쇄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근거로써 쓰인다.
=== 마다시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
《난중일기》에는 마다시(馬多時)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명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맞으며 일본의 유명한 [[해적]]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함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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