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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라의 3차 침입 ===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산군|자주]](慈州)와 [[신계군|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구성시|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