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1세 (프로이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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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1세'''({{llang|de|Friedrich I.}}, [[1657년]] [[7월 11일]] - [[1713년]] [[2월 25일]])는 초대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국왕]]이다(재위 : [[1701년]] [[1월 18일]] - 1713년 2월 25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는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재위 : [[1688년]] [[5월 9일]] - 1713년 2월 25일)이다.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루이제 헨리에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1688년]] 선거모체에 계승하였고, 13년 후에 왕좌에 올라 [[베를린]]에 도읍하였다. 그가 왕좌에 오를 때, 프로이센은 무거운 의무를 지웠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손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2세]]때 와서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유럽 정책에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와 제휴하였다.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나서, [[스페인 계승전쟁]]에도 개입하여 오스트리아와 동맹으로 남아 프로이센의 군사적 공헌이 눈에 뜨인다는 증명을 하였다. 그러나 [[위트레흐트 조약]]의 결과, [[스위스]]의 [[뇌샤텔 주]]와 [[라인 강]] 저지대에 놓여있는 몇 영토들로 이루어진 프리드리히의 영토 보수가 작았다.
 
프리드리히는 또한 황제의 사법적 종주국으로부터 새 왕국을 해방시켰고, 그 국고를 늘였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유입으로 새로운 산업과 땅의 간척 등이 이루어졌다. [[1694년]]에는 [[할레]] 대학을 세우는 등, 프로이센 문화의 발전에 기초를 세웠다. [[1713년]],에 56세의 나이로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분류:1712년 태어남|프리드리히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