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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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의 역사 ==
[[파일:Korea-Ganghwado-Dolmen-02.jpg|thumb|left|180px200px|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화도면 동막리]] 유적과 [[하점면 삼거리]] 유적 등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다량 출퇴된 것으로 보아 강화도에는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에서는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이다. 100여기가 넘는 수의 고인돌이 강화도에서 확인되고있는데,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고인돌의 대부분은 [[고려산]]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수의 고인돌 때문에 [[마한]]의 소국들 중 하나가 강화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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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었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봉림대군]] 등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항복하였다. 이후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옮겨졌다. [[효종]] 때에는 [[북벌 정책]]을 계획하면서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광성보 등의 [[진 (군사)|진]]과 [[보 (군사)|보]]를 설치하였고, 성곽을 수리했다. [[숙종]]은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의 전 지역을 요새화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생성된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양명학]]으로 유명한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주자학]]에 치우치지 않고 경전의 본뜻을 중시하는 [[강화학파]]라 불리는 학풍이 일어났다. [[정조]] 때에는 [[외규장각]]이 강화도에 설치되었다.
[[파일:FranceGanghwa.jpg|thumb|180px|강화성을 공격하는 프랑스군]]
 
조선 후기 [[병인박해]]를 구실로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온 [[병인양요]]가 일어났고,일어났다. 이로 인해 강화의 외규장각이 약탈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 함대를 몰아냈다. [[1875년]]에는 일본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고 무덤은 도굴되었다. [[광복]] 후에도 관리 소홀로 군사 유적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섬 내의 성들도 파괴된 정도가 심해서 성의 크기 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강화도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강화 양민학살 사건]]) 또한 개성에서 피난민이 강화도로 오면서 인삼재배가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1976년]]에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 정화사업으로 몇몇 유적들이 복원, 관리되고 있다. [[2000년]] [[11월 29일]]에는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강화의 고인돌이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