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우지쓰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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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시·시모우사로의 세력 확장 ===
 
[[호조 우지쓰나]]는 부친 때부터의 거점인 [[이즈]](伊豆)의 [[니라야마 성]](韮山城)을 떠나 [[사가미 국|사가미]](相模)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성을 이세에서 호조로 고쳤다. [[1524년]]([[다이에이 (연호)|다이에이]] 4년), 우지쓰나는 [[오기가야쓰 우에스기가]](扇谷上杉家)의 당주인 [[우에스기 도모오키]](上杉朝興)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山內上杉家)의 [[우에스기 노리후사]](上杉憲房)를 방문해 [[가와고에 성]](川越城)에 머무르는 사이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가신인 [[오타 스게타카]](太田資高)를 자신에게 넘어오도록 부추겨 [[에도 성]](江戸城)을 손에 넣었다. 같은 해 2월에는 2년 전까지는 아군이었던 [[이와츠키 오타씨]](岩付太田氏)의 [[이와츠키 성]](岩付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오타 빗츄슈(太田備中守, [[오타 스게요리]](太田資頼)의 형)를 죽였다. 그리고 케로 성주(毛呂城主)인 [[케로 타로]](毛呂太郞)와 오카모토 쇼겐(岡本将監)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케로]]에서 [[이시도]](石戸)에 이르는 지역을 제어하게 되어 적 세력에 속해 있는 [[마쓰야마 성]](松山城)과 가와고에 성 사이의 통행을 차단했다. 우에스기 도모오키는 여기에 맞서 [[6월 18일]] 오타 스게요리와 손을 잡고 한편으로는 [[가이노쿠니|가이]](甲斐)의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와 연락을 취해 [[7월 20일]]에는 [[다케다 노부토라]]가 [[무사시노쿠니|무사시]](武蔵)로 쳐들어가 이와츠키 성을 함락시키고 오타 스게요리에게 성을 돌려주었다. [[1530년]]([[교로쿠]] 3년) [[호조 우지쓰나]]는 장남 [[호조 우지여스우지야스|우지야스]](氏康)와 함께 [[다마가와 강]](多摩川) 부근에서 우에스기 도모오키를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오자와가하라의 전투]](小沢原の戦)). [[1537년]]([[덴분]] 6년)에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사망하고 젊은 [[우에스기 도모사다]](上杉朝定)가 뒤를 잇자 [[호조 우지쓰나]]는 곧바로 침공을 개시, 가와고에 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간토쿠보]](関東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晴氏)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다. 당시 간토쿠보의 이인자(二人者) 격인 [[간토간레이]](関東管領)는 대대로 오기가야쓰·야마노우치의 양(兩) 우에스기가 중 한 쪽이 물려받았는데, 형식적으로 간토간레이의 후임자를 승인하는 기관이 간토쿠보였으므로, 우지쓰나가 간토쿠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은 간토간레이 직(職)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호조 씨의 일원이 간토간레이를 자칭한 적은 없다.
[[1538년]] [[호조 우지쓰나]]는 [[오유미쿠보]](小弓公方)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유미쿠보)|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와 [[아와 (安房)|아와]](安房)의 [[사토미 요시타카]](里見義堯)의 연합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죽여 오유미쿠보를 멸망시켰다([[고노다이 전투]](国府台合戦)). 이 때부터 그의 영향력은 무사시 남부와 [[시모우사]](下総)까지 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