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예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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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수된 작품들은 베를린 보관소로 모아졌다. 미술관에서의 몰수는 1938년 5월 31일에 제정된 '퇴폐예술품 압수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 소급해서 합법화되었다. 괴링은 개별 작품들을 팔았고, 히틀러는 몇몇 작품을 '고대 거장의 작품'과 교환했고,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던 중앙 소방서 마당에서 1939년 3월 20일 공식적인 공고에 의하면 1004점의 회화와 3825점의 그래픽이 소각되었으며, 많은 작품들이 감추어졌다. 125점의 작품이 1939년 6월 30일 루처른에서 경매되었다. 몰수된 작품의 판매는 제국의 위탁을 받아서 대부분 베른하르트 뵈머, 카를 부흐홀츠, 힐데브란트 쿠르리트와 페르디난트 묄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괴벨스가 1939년 7월 4일 히틀러에게 한 최종보고서에 의하면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파괴되었거나 창고에 보관되었으며, 300점의 회화와 조각품 그리고 3000점의 그래픽이 외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references/ref>Gabriele Franke: Fabeltier oder "Judengeschoepf". Chronik einer Recherche. Hamburg 1990. S. 107</ref>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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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일의 미술관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구입이나 기증을 통해서 현대 미술의 중요한 수집품을 모았다. 1937년 여름 '퇴폐예술'이라는 선동 행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압수를 통해서 박물관은 재고의 상당 부분을 보상없이 빼았겼다.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의 전직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헨첸은 대규모 예술적, 물질적 손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탄을 했다.
 
"수집품의 확대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 미술시장 가격이 우리가 지닌 불충분한 수단으로부터 멀리 벗어날수록, 그 만큼 더 느리게 이루어진다. 여러 개의 심각한 틈새가 더 이상 메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해야할 지경이 되었다. (......) 이런 부족과 틈새에 대해서 모든 독일 미술관이 할 수 있는 설명을 동일할 것이다. 쿠스타프 파울리가 1914년부터 1933년까지 신중하게 고려해서 확대시킨 현대 미술품 수집의 근간이 1937년 압수와 판매 행위로 인해서 파괴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선별적으로 수집한 작품 중에서 오직 5점만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정도의 규모로 파괴가 이루어졌다. 파울리가 젊은 동시대의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 중에서 구입했던 모든 작품들, 다시 말해 뭉크, 놀데, 키리히너, 슈미트 로트루트, 헤켈, 코코슈카, 프란츠 마르크의 주요 작품과 피카소가 청색 시대 초기에 그린 작품이 그림 파괴 행위에 희생되었고, 오늘날에는 외국의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품에 포함되어 있다. 그 같은 손실은 결코 다시는 온전하게 보충될 수 없다."<ref>알프레드 헨첸</ref>
 
===잊혀진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