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바 대학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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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에 기술학교(Universitas Artistarum, 천문학-변증법-철학-문법-수사학)가 법학교(Universitas Iuristarum, 민법-교회법-신학)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것은 [[카라라의 프란체스코 2세]](Francesco II da Carrara)의 개입으로써, 그 해부터 각각 동등한 권리와 특권, 2명의 총장을 두는 2개의 대학교로서 존립케 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유지된 파도바대학교는 초기에는 6년제 과정을 유지하였으나, 1500년대에는 5년제로, 그리고 1700년대에는 4년제로 학제에 변화가 오게 된다. 파도바대학교의 학생들은 수업(lectiones)에 출석해야 했고, '학습(repetitiones)-질문(questiones)-토의(disputationes)'로 구성된 학업활동을 따라야 했다고 한다.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학생들은 2개의 Nazioni라는 그룹으로 구분되었다(이탈리아 학생들을 위한 Natio Citramontana(알프스 이남의 학생들;파도바가 알프스와 가깝기 때문)와,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Natio Ultramontana(알프스 너머로부터 온 학생들), 이후 1831년 하나의 대학으로 재결합한다).
 
1405년 [[베네치아 공화국]] 치세에 이르러, 파도바대학교는 절정의 황금기를 맞는다. 1400년부터 1600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대학은 국제적인 학문과 연구의 중심지로 거듭났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 자유로운 학문과 연구을 보장하였기에 파도바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의 [[:it:Serenissima|세레니시마]]라는 정치경제 시스템 아래서 그것이 가능하였다. 바로 이 황금기에 파도바대학교는 'Universa Universis Patavina Libertas(파도바의 자유, 그 누구에게나, 그리고 모두를 위해 )'라는 모토를 삼고, 유럽 과학의 중심지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 1493년에는1493년에 이르러, 법학교(Universitas Iuristarum) 숫소휘장 아래 여관(Hospitium Bovis)으로 쓰이던 건물을 보다 넓히고 개조하여, [[:it:Palazzo del Bo|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오늘날의 본관 건물로 이전하게이전하였고, 중세 이후의 각 서유럽 국가들의 통치구조 재편을 위한 법리와 법률에 관한 과학적 연구와 방법론으로 명성을 높히게 된다.
 
1543년 내과 및 해부학장이었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해부학의 창시자로 [[:en:De humani corporis fabrica|인체조직에 대하여]](全 7권)을 통해서 이탈리아는 물론이거니와, 유럽 전역에 해부학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동시에 유럽 도시마다 해부학 교실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