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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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곤'''(李長坤, [[1474년]] ~ ?)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희강, 호는 학고와 금헌, 금재, 우만, 시호는 정도이며 본관은 [[벽진 이씨|벽진]]이다.
 
참군 [[이승언]]의 아들이자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149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1502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504년]] 교리로 있던 중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휘말려 [[거제]]로 귀양갔으나 [[함흥]]으로 도주하여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끼어 살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교리와, 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으며 학문과 무예 모두 겸해 [[조선 중종|중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1512년]] [[여진족]]의 침략을 무찌르고 [[1513년]]에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1514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1519년]] [[병조참판]]으로 재임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참여했으나 체포된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신진 세력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삭직당했다.
 
[[1522년]] 복관되어 [[여강]]과 [[창녕]] 등지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