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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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독소 전쟁]] 발발을 틈타 [[체첸]]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反)소련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1942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스탈린이 총지휘하는 소련군은 [[독일]]군과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세는 역전되어 독일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1943년]] [[12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윈스턴 처칠|처칠]] 등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체첸]]의 반발이 가라앉지 않자앉자, 스탈린은 체첸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44년]] 봄, 비밀리에 [[체첸]]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과정에서 반발하는 자는 사살했고, 체첸인구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몇번의 쿠테타 이후 동료들을 믿지 못했고, 특히 [[군대]]를 불신하여 장군을 다수 죽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쟁 초기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 처럼 군사 업무에 수시로 관여하고 전화를 이용한 부적절한 지령으로 [[군사]]업무에 간섭하다가, 점차 군사적인 결정을 현지의 지휘관들에게 위임하였다.
 
[[1945년]]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얄타 회담]]을 추진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대단한 협상가로서 이 외국 정치가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협상했는데, 그의 우수한 협상 기술은 당시 [[영국]]의 [[외무부|외무부 장관]] [[앤소니 이든|이든]]이 칭찬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연합군 측의 승리로 [[독소 전쟁]]의 최종 승리는 당연 스탈린의 차지가 되었다. 연합군의 항복 직전 [[8월]] 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도움 요청으로 [[일본]]의 식민지에도 소련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10여 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고, 스탈린은 아시아에서도 [[소련]]의 몫을 요구하였다. 국제사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군 부상자와 사망자가 수천명임을 들어 대가를 요구하였다.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에 재선출되었다. [[1945년]] [[6월 27일]]에는 [[소비에트 연방]] [[인민군]] [[대원수]]에 취임하여 소련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6년]] [[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담당위원직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고, 1947년 3월 3일에는 자신이 겸하던 국방부장관직에 [[니콜라이 불가닌]]을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