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1기병사단의 포항 상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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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동항은 해군함정의 동해안 함포사격에 힘입어 아직 전선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7월 10일]], 포항이 상륙지로 결정되자 이날 LST로 포항에 도착한 제5공군 항공기술자들은 활주로를 확장 보수하기 시작하였다. [[7월 11일]]에는 상륙작전에 필요한 해안정보를 수집하려고 해군장교 3명과 제 1기갑사단의 정보장교 2명이 포항으로 공중 정찰하였다.
이들은 해안의 수심상태, 하역시설 및 포항의 전반적인 기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7월 13일]] [[일본]] [[도쿄]]로 돌아갔다. [[도쿄 만]]을 출발한 선발 수송선단의 도착을 앞두고 [[7월 14일]]부터 7척의 소해정(YMS)이 [[포항]] [[
[[7월 15일]]에는 안전한 행정상륙을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마지막 정찰비행을 하였다. 이 정찰비행으로 포항상륙은 무저항 행정상륙이 가능하리라고 확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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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기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자, 미 제 8군사령관 월턴 워커(W. H. Walker)중장은 대기중인 운송열차및 차량에 그들을 탑승시켰다. [[7월 19일]], [[허버트 R. 게이]](H. Gay)소장은 상륙군의 작전 지휘권을 인수하였으며, 이날 18:00에는 일부병력을 해안 방어작전에 투입하였다.
상륙군은 사기가 왕성한 가운데, 전선으로 계속 투입되었는데, 포항상륙 4일 만인 22일에는 영동지구에서 24사단과 방어임무를 교대하였다. 이날 [[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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