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아테스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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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hraatesIVProfile.jpg|thumb|프라아테스 4세]]
파르티아의 왕 '''프라아테스 4세'''는 [[오로데스
그는 그의 형제 파코루스 1세의 사망 후에 기원전 37년 계승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그의 어버지와 그의 30 형제를 살해하였다. ▼
그리고 패하여 그의 군대중 더 큰 부분을 잃었다. 안토니는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에 의해 배반당하였다고 믿고 기원전 34년 그의 왕국을 침입하여 그를 체포하고 또다른 아트로파테네의 왕 아르타바스데스와 조약을 결정하였다. ▼
▲그는 그의 형제 [[파코루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안토니우스]]는 그의 정복을 유지할수 없었다. 프라아테스는 아트로파테네를 회복하고 아르타바스데스의 아들 아르타크세스를 다시 아르메니아로 보냈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잔인함에 의해서 프라아테스는 그의 백성의 불신임을 일으키고 그들은 티리다테스 2세를 기원전 32년 왕좌로 뽑았다.▼
▲그리고 패하여 그의 군대중 더 큰 부분을 잃었다. 안토니는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에 의해 배반당하였다고 믿고 [[기원전 34년]] 그의 왕국을 침입하여 그를 체포하고 또다른 아트로파테네의 왕 아르타바스데스와 조약을 결정하였다.
프라아테스는 스키타이에 의해 복위되었다.그리고 티리다테스는 시리아로 달아났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장군 마르쿠스 니키니우스 [[크라수스]]의 파르티아에 대한 패배에 보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협상에 만족하였는데 그에 따라 프라아테스는 포로와 정복된 매를 돌려주었다. 아르메니아 왕국도 역시 로마 속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안토니우스]]는 그의 정복을
▲프라아테스는
곧바로 프라아테스는 가장 큰 적인 자신의 가족이므로 다섯 아들은 [[아우구스투스]]에세 볼모로 보내고, 그리하여 그의 로마에 의존하는 것을 감사하였다. 볼모는 티리다테스 3세를 포함 하였는데 그를 로마는 서기 35년 속국 왕으로 설치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계획은 이탈리아 부인의 조언으로 채용한 것인데 그녀를 그는 여신 무사(뮤즈)의 이름을 채용하고 본부인으로 선언하였다. 그녀의 아들 프라아테스 5세는 보통 프라아타케스라 불리며, 그는 계승자를 임명하였다.
[[기원전 2년]] 무사와 그녀의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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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파르티아 왕
|임기 = [[기원전 37년]] - [[기원전 2년]]}}
{{파르티아의 역대 황제}}
[[분류:파르티아 제국의 황제]]
[[분류:기원전 2년 죽음]]
[[분류:암살된 사람]]
[[bg:Фраат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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