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빈 윤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uriga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Auriga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 생애 ==
[[공조판서]]를 지낸 윤사익(尹思翼)의 아들인 윤옥(尹玉)의 딸로 태어났는데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나 실록에 의하면 간택되었을 때 10세였다고 한다. [[1561년]] 순회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으나 2년 뒤인 [[1563년]]에 순회세자가 서거하자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덕빈'''(德嬪)이라 불렸다. '''공회'''(恭懷)는 시호이다. 순회세자 사후, [[조선 선조|선조]] 즉위 후에도 궁에서 계속 생활하다가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3월 [[창경궁|창경궁 통명전]]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창경궁에 빈소를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하여 상례(喪禮) 절차를 진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선조와 신하들이 [[의주]]로 급히 피난을 가면서 어가가 벽제에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1593년]]에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그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을 때 찾지 못하였다. [[1603년]], 결국 선조는 신주(神主)만 봉안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을 순회묘(順懷墓, 고종7년 이후 순창원)에 합장하였으나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 분실되었고 '''순창원'''(順昌園)에는 순회세자의 재궁(梓宮, 관)과 공회빈의 빈 재궁만 안장되게 되었다.
 
공회빈의 시신이 행방불명된 일은 《선조실록》에는 전말이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단지 그의 졸서일 기사를 통해 왜란이 일어났을 때 빈소(殯所)의 관리들이 관이 무거워 가매장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궁에 화재가 났다고 간략하게 전하며, 이어 그가 생전에 불교를 깊이 숭상하더니 우연히 화장(火葬)하게 된 셈이라는 촌평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순창원은 지난 [[2006년]], [[문화재청]]에 의해 도굴 미수 현장이 발견돼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98&aid=0000105057& 문화재청, 서오릉 순창원(順昌園) 도굴 미수 현장 발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