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차오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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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 = {{국기그림|중화민국}} [[국민혁명군]]
|교전국2 = {{국기그림|일본}} [[일본군]]
|지휘관1 = [[그림파일:Flag of the Republic of China.svg|25px]] [[쑹저위안]]
|지휘관2 = [[그림파일:Flag of Japan (bordered).svg|25px]] [[다시로 간이치로]]
|병력1 = {{국기그림|중화민국}} 100,000
|병력2 = {{국기그림|일본}} 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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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징]]<ref>당시에는 베이핑(北平)이라고 불렀음</ref> 서남쪽 방향 [[루거우차오]]({{zh|h=노구교{{통용 표기}}|t=盧溝橋|s=卢沟桥|p=Lúgōuqiáo}})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일본군의 자작극이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정부는 전쟁 상태로 돌입, 그 후 전선을 확대하게 되었다.
 
== 명칭 ==
이 전투는 나라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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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lang|ja|盧溝橋事件|Rokōkyō Jiken/로코쿄 지켄}}: '''노구교 사건'''
== 배경 ==
[[1931년]] 일본은 중국 북동부지역인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웠고 다음해에는 열하({{zh|s=热河省}})를 점령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이 [[둥베이|동북지방]]에 가속화되자 중국 내에서 점차 항일 운동이 확산되었으나 [[장제스]]는 먼저 공산당을 분쇄하여 통일을 이루고 난뒤에 일본에 대항하자고 주장하며 [[국공내전|대공산군 토벌작전]]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특히 동북지방에서 반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1936년]]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의 종식에 합의하고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루거우차오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부르는데 이 다리는 전략적으로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으로 사건발발 당시 일본군은 서쪽을, [[국민혁명군|국민당군]]은 동쪽을 관할하고 있었다.
 
== 사건의 전개 ==
당시 이 부근에 주둔한 군대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의 29군이었고 일본군은 카니치로 타시로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 양 군은 서로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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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곧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고 중국군은 연패했다.
 
== 결과 ==
중국군은 기계화 병력인 일본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베이징은 8월 29일에, 다음날은 [[톈진]]이 함락되었다. 이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 되었고 중국내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국민당은 [[홍군|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대(對)일본 항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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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 사건과 비슷한 자작극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
*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 독일 대 폴란드
* [[마이닐라 발포 사건|마이닐라 발포 사건]] : 소련 대 핀란드
 
== 주석 ==
 
<references />
 
[[분류:1937년]]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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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ncident na moste Marca Pola]]
[[sv:Marco Polo-broincidenten]]
[[ta:மார்கோ போலோ பாலச் சம்பவம்]]
[[th:เหตุการณ์สะพานมาร์โค โปโล]]
[[tr:Marco polo köprüsü hadise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