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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2일 (일) 09:16 판
틀:청일전쟁 전투 목록 여순 전투(旅順攻囲戦)는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치른 첫 전투로 단 하루만에 전략적 항구인 여순항을 함락시켰다.
여순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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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의 일부 | |||||||
여순의 성채를 포격하는 일본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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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청나라 | 일본 제국 | ||||||
지휘관 | |||||||
이홍장 | 야마지 모토하루 | ||||||
병력 | |||||||
1만 3000명 | 1만 5000명 | ||||||
피해 규모 | |||||||
4500명 전사 |
29명 전사 233명 부상 |
배경
압록강 전투와 황해 해전에서 대패한 청군은 요동 반도를 따라 여순으로 후퇴해 방어진과 강력한 포병을 강화해 난공불락 요새를 알려지게 했다.
전투 과정
오야마 이와오의 명령을 받은 1연대와 일본군 육군 제2사단은 야마지 모토하루 중위가 이끄는 12여단의 6연대는 1894년 10월 24일 피커우 지역에 상륙한다.
그리고 여순으로 진격해 11월 6일 친커우를 지나 11월 7일 항구에 도착한다. 11월 21일 자정부터 여순에 대한 습격이 시작되어 11월 22일 육지쪽의 모든 중요한 방어 지역은 일본군이 차지해 포격을 했고 결국 청군 수비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생존한 수비대는 큰 57구경 대포와 작은 163구경 대포, 화포들을 버리고 철수했다.
결과 및 영향
이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한 대학살이 일어났는데 1894년 11월 서양의 기자들에 의해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일본은 국가 위상 손상과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재교섭을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