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키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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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교회와의 관계 ===
마우리키우스의 치세에 서방교회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는데 [[58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요한네스 4세 네스테우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구가 ‘세계 총대주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교황 펠라지오 2세]]와 대립하였다.

2년 뒤에는 더욱 강력한 교황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대립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마우리키우스에게 요한네스 4세를 징계하라고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로마 교황과 대립하였다.
 
=== 말년 ===
마우리키우스의 치세 동안 전임 황제 티베리우스의 낭비로 줄어든 국고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마우리키우스는 에산절감을 위해 긴축 정책을 폈다. 지나친 긴축정책으로 병사들과 신민들의 인기를 잃었다. 588년의

[[588년]]의 군대 폭동, 599년의[[599년]]의 아바르족의 포로학살은 모두 마우리키우스의 긴축정책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602년]] 급기야 군대에게 도나우 강 너머의 야만족의 땅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군대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포카스]]라는 백인대장을 황제로 추대했다.
 
반란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자 시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마우리키우스는 [[소아시아]]로 도망쳤다.
 
반란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자 시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마우리키우스는 [[소아시아]]로 도망쳤다. 포카스는 총대주교와 원로원을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에 올랐고 마우리키우스와 그의 가족들은 붙잡혀 처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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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602년 죽음]]
[[분류:비잔티움의 황제]]
[[분류:사형된 사람]]
 
[[an:Mauricio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