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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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렌은 곧 콩데 공작과 스페인군과의 유인을 필요로 했으나, 스페인계 프롱드 반란무리의 전국이 길어지는것이 튀렌과 콩데 공작 양측에게 계통을 확립할 지도력을 보여주기 위한 넓은 시야를 주었다. 1653년 튀렌은 유리했다. 콩데 공작이 로크로아만을 획득한 사이에 그는 루트르, 상드-무느와, 무종을 공략했다. 1654년 단기원정으로 다시 프랑스군이 유리해졌다. 1654년 7월 25일 왕당군은 아라스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1655년 프랑스군은 대부분의 영지를 얻었으나, [[1656년]] 튀렌은 바란시에느에서 그가 아라스에서 콩데 공작을 격파한것과 같은 방법으로 패배를 당했다. 전쟁은 튀렌이 덩케르크 근교의 듀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1657년]]에 종결되었다(이 전투에는 당시 동맹관계에 있던 잉글랜드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부대를 보내왔었다). [[1658년]] 다른 지역에서 원정을 벌여 승리한 결과 [[1659년]]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게 되었다.
 
[[1661년]] 마자랭이마자랭 추기경이 죽자, 루이 14세는 자신이 직접 친정을 개시했다. 그는 처음으로 튀렌을 프랑스 왕국군의 대원수로 임명했다. 만약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튀렌을 위해 왕은 [[1627년]] 폐지한 [프랑스 궁내장관](Constable of France, 프랑스어:connétable of France)직의궁내장관직의 부활을 타진했다. 튀렌은 이것을 거절했다. 양친 모두 [[칼뱅]]교도였고, 자신도 개신교 신자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1639년]] 리슐리외가 요청한 자신의 조카 1명과의 결혼도 거절했고, 마자랭으로부터 나온 그의 친척과의 결혼의뢰도 거절했던 전력이 있었다.
 
[[1652년]] 튀렌은 오랫동안 존경하던 [[개신교]] 신자이자 프랑스 원수인 포르스 공작의 딸 샤를로트 드 코몽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양쪽의 적대하는 진영 중간에서 크리스트교 교회의그리스도교의 불화를 마음속 깊이 한탄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다수의 의견과 다르다고 억압하는 일파의 영향을 신용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국민의 독립과정이 그의 생각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리고 영국의 장로파 교회가 갑자기 [[왕정복고]]로 전환하는 무질서한 모습에서 공포를 느껴 튀렌은 결국 가톨릭 교회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와 아내 샤를로트 사이에서 교환된 편지에서는 이러한 2사람과도두 사람과도 밀접한 이 사건에 대해 효과적인 증언을 배울 수 있었다. 2년 후 샤를로트가 죽고 편지 교환이 끝나고, 쟈크 베니뉴 보슈에보쉬에 사교의주교의 열변과 튀렌의 조카 부용승의조카의 설득으로 그는 가톨릭 신앙에신앙으로 찬성했다개종했다(1688년 10월). [[1667년]] 튀렌은 결국 왕당군으로 돌아왔고, 프랑스군의 남부 네델란드 침공을 지휘했다(보통은 루이 14세가 지휘). 곧이어 왕과 화해한 콩데 공작은 [[프랑슈 콩테프랑슈콩테]] 지방을 재빨리 정복하여 튀렌과 전공을 다투었고, 1668년 2월 [[네델란드 계승전쟁]]([[프랑스-네델란드 전쟁]])을 종결로 이끌었다.
 
==대 네델란드 전쟁==